손주가 할배 데리고 놀기
휴가를 며칠 받아 놓고 어딜 갈까 망설이다가 전날 후배들과 과음을 한 관계로 무작정 고속버스를 타고 떠날 계획도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내가 워낙 일찍 일어나니 아침 7시도 남들에게는 새벽이지만 집사람이 아이를 데리러 딸 네 집에 간다며 나설 채비를 한다.
‘내가 데려다 줄게’
마누라도 몰래 새벽같이 어디로 튀었을 줄 알았던 남편이란 작자가 데려다 준단 말을 하자 좀 놀랜 표정이다. 출근준비를 하는 엄마를 보는 꼬맹이는 놓치지 않으려고 벌써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다. 할 수없이 딸래미와 꼬맹이를 태우고 딸 회사로 향한다. 엄마가 후다닥 내리고 나니 꼬맹이는 엉겁결에 당한 게 원통한지 카시트에 옴짝없이 묶인 채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엄마를 찾는다. 아무리 달래도 15분 정도는 계속 울어 제끼더니 이제는 사이사이에 ‘어~엄, 흑, 흑 엄마~ 엄마한테 가~’를 간헐적으로 외친다. 남의 애를 보면 ‘괜찮다. 이놈아.’하고 웃으면서 지나칠 일에 마음이 언짢다. 이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든가?
차는 한탄강 유원지로 향한다. 이제 울음을 그친 꼬맹이는 엄마 만나기를 포기하고 궁리 끝에 ‘차선책’으로 외할미 집으로 가자고 떼를 쓴다. 벌써 서울을 빠져나온 지 한참이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은 차들로 꽉 막혀있는데 서울로 들어 갈 재간이 없다. 이제는 살살 달래서 유원지에 떨궈놓고 구워 삶아보는 수밖에, 에그 불쌍한 것!
지나가는 탱크와 군인 차에 눈을 빼앗겼던 꼬맹이는 계속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외할미 집으로 가자해서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만든다. 한탄강 유원지 입구에 세워놓은 아치위로 맘모스와 구석기 시대 사람, 호랑이 등이 애의 눈을 홀린다.
할머니하고 자란 애들은 조심성이 많은 것 같은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입장시간을 맞추기 위해 강섶을 거닐며 ‘저 아래 내려가 볼까?’하니 뒷걸음질 친다. 한 바퀴 돌아오니 배도 고팠는지 “우리 여기서 라면 하나 먹어볼까?” 한다. 누구한테서 배웠는지 이 녀석은 권유형 말투를 쓰는데 이런 때는 영감탱이가 뱃속에 하나 들어가 앉아 있는 것 같다.
10시 전인데 벌써 우리 말고도 꼬마 3명이 기다리고 있다. 어른 허벅지 절반 정도 깊이의 계단식 풀장에는 미끄럼틀이 있고 주변에 야외 테이블을 갖다 놓았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음료수가 없다. 뱃속에 영감탱이가 들어 앉아 있으니 잘 있겠지. “할비 저기에 금방 갔다 올게”, 끄덕끄덕.
비가 마르지도 않은 땅에서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뛰어가 음료수를 사고 내려오며 보니 녀석이 안 보인다. 가슴이 덜컹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니 길 아래쪽에서 다리를 번갈아 올리고 내리며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고 울면서 “하부지~ 하부지~”를 고래고래 외치고 있다. 그런데 이 녀석 좀 봐라, 그 위급상황에서도 신발을 챙겨 신고 있네. 문득 H맥주 광고에 나오는 청년처럼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쫓아 내려가 눈물울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니 따스한 체온이 온몸으로 전달돼 온다.
조금 지나니 유치원 아이들이 떼거지로 들어온다. 알록달록 수영복과 튜브. ‘아 튜브가 있었지.’ 꼬맹이를 끌고 대여점으로 가서 조그만 튜브를 빌려 태워 놓았더니 걷다 밀다하며 다른 아이들을 참견하며 물오리처럼 잘도 떠다닌다.
이제는 튜브도 질리는지 옆에 팽개쳐놓고 가운데 미끄럼틀로 슬슬 접근한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시야에서 꼬맹이가 사라졌다. 화급히 반바지를 걷고 뛰어 들어가니 녀석은 미끄럼틀에서 하강 중인데 머리를 위에 두고 포복하는 자세로 내려오고 있다. 나 모르는 사이에 똑바로 앉아 내려오다 물을 한번 먹었나? 그랬으면 울고불고 난리였을 텐데...
벌써 들어온 지 3시간 반이 지나고 있다. 할미집으로 가자는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다. 원래 제 필요한 것만 듣는 녀석이니까. 겨우 안전요원 호각소리에 집으로 향한다.
녀석은 차 안에서 사탕을 빨다가 입가로 사탕물을 흘리며 꿈나라에서 물놀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