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처가 일기 2
뚜껑있는 용기에 담긴 반찬이 나온다든가,
몇끼분 곰탕을 뎁혀먹는다든가까지는 좀 참을 수 있는데,
"우리 남편은 나 없어도 잘 차려먹어~" 까지 되면 이거 문제가 좀 있는거지요?
일식씨, 이식이, 삼식놈 -많이 정화한겁니다.- 이라는 우스개가 있지만
'혼자서 잘 차려먹어' 정도가 되면 호칭이 무엇이 될 지 궁금합니다.
(뭘해 먹을려면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단 장보러 나가봐야지요.
장바구니 드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면 胃大한 공처가 반열에 낄 수 없습니다.)
(음식점에서 다섯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비리비리한 알탕이 아닌
튼실한 알이 가득한 동태알이 그득한 알탕이 갑자기 먹고 싶어졌습니다.
해물집으로 가봐야지요.
가서보니 저~기 저 관자묶음이 나를 오라 합니다.
이런 조리되지 않은 식재료를 보고 침이 고여야 진정한 공처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분들이 꽤 계십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조리보다는 그냥 궈먹거나 물에 풍덩 연포탕을
해잡술려고 오신 분들이지요.
대개 해잡숴도 손이 별로 안가는 구이들을 선호하는데 이때 파절이라도
초고추장에 계란 노른자 하나, 맨 파에 다시다 가루 혹은
살짝 데친 파를 미소에 버무려 곁들여 잡수셔도 맛은 배가 됩니다.)
여성은 나이가 들면 여성 호르몬의 분비가 급격히 줄어들고
이에 반해 남성은 별 차이가 없다고 학술적으로는 주장하지만
주위 여러분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아마 남성도 남성 호르몬 분비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 아닌가
상당히 신빙성 있는 심증이 갑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알탕입니다. 알탕은 탁하지 않게 끓여도 되니까
그저 간만 잘 봐도 되는 요리지요.
알이 푸짐하지요?
콩나물과 빨간 고추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거 찾는다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공처가의 신조입니다.)
(이 정도는 손질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 뜨는 것보다 쉽습니다.
진짜라니깐요~
참, 저기 보이는 새우는 등쪽을 따서 내장을 꼭 제거해주셔야 합니다)
오늘은 제가 만든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여러분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연막을 치는겁니다.
제가 아무리 공처가라도 아직 쬐끄만 자존심은 남아 있걸랑요~
(위 재료로 만든 해물우동입니다. 전복 들어 갔지요, 새우 들어 갔지요, 오징어 조금.
냉장고 문짝에서 간택되길 기다리던 두반장 한숟가락을 건데기 없이 체에 걸르고 고춧가루 한숟가락,
국간장으로 간만 조금 보면 끝)
한 십년 이상 되었을 것 같은데 아이 친구들과 하루밤을 시골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저야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 한잔 마시고 고기나 구어줄려고 따라 갔지요.
이것들이 보나마나 한밤중에 배고프다 할 것 같아
볶음밥을 해줄려고 마트에서 보리쌀을 사가지고 밥통에 씻어 넣을려고
봉지를 까보니 그야말로 맨 보리만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돌아버렸나? 왜 보리쌀을 보리+쌀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미 술독에 머리 처박았는데 다시 차끌고 갈 수도 없고
고기 먹을 동안 보리를 물에 팅팅 불립니다.
'어떠케 되겠지...'
(낙지볶음이야, 뭐~ 간단하지요. 노량진 갈 것도 없이 동네 마트에서
낙지 한팩에 고추장과 마늘, 양파, 파 정도면 쏘주 한병 거뜬합니다.
양배추와 소면은요? 그거 없으면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조림도 해물을 손질하고 일차 끓여서 거품 걷어내고
가쓰오부시장과 진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물엿 조금, 중불에 살살 조립니다.
출출할 때 안주삼아 맥주 한잔하면 딱이지요.)
이윽고 밤은 깊어 자정이 넘어가니 배고프다는 말이 슬슬 나옵니다.
설겆이가 필요없을 만큼 남은 고기와 파절이, 야채, 마늘, 김치를 넣고 달달 볶은 다음 보리밥을 넣습니다.
기름도 별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야들 지방분권주의로 가잡니다.
고기 따로, 김치 따로, 밥알 따로 지방자치 잘하며 잘 볶아집니다.
퓨전요리가 따로 있나요? 이게 웰빙식이지요.
(소고기 짜장볶음과 파, 이걸 경장유슬이라 부르지요.
꽃빵이 있으면 좋겠지만 머, 안주로 먹는건데 꽃빵쯤이야.)
(일찍 들어와보니 집엔 아무도 없고 식은 밥은 있겠다. 밥을 달달 볶은 후
행이나 스팸, 파를 썰어넣고 기름을 좀 더 두른 후 허브후추로 간맞춰 먹으면 간단하고
의외로 김치 없이 파만으로 해먹어도 맛이 괜찮습니다)
(아그덜 좋아 할 떡볶기. 주방에서 달그럭거리는 아빠를 편들어 줄
우군을 위해 꼭 필요한 메뉴.
옛날 광화문 여학생들이 많이 가던 분식점 금잔디를 떠올리며 만들면 절로 만들어집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었는지 술때문에 쌀과 보리를 구별할 분별력을 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마디 할 줄 알았던 녀석들은 꾸역꾸역 잘도 먹더니
"아버님, 맛있어요."합니다.
저야 대낮이겠지만 지들 말로 아침에 해장국이라도 한술 뜰려면 별 수 있나요?
영악시런 놈들입니다.
요샌 올리브채널 같은 프로를 보면 씩씩한 남성들이나 멀쩡한 꽃남들이 나와, 밑줄 쫘악 그었습니다아~
보기좋고 맛깔스런 음식을 능청스럽게 만들어 내는 걸 심심치 않게 봅니다.
나야 머~ 버터, 올리브 오일 듬뿍 들어가는 양식은 별로니까~
(좀 럭셔리하게 전복물회, 날씨 더운 휴일날 이른 저녁에 하나 만들어
맥주와 함께...)
(기왕 내친 김에 낙지 탕탕이까장, 이건 단독주택에서 스트레스 풀면서
두드려야 제 맛인데 공처가가 어디 감히 소리나게 두드릴 수나 임나요?
아파트에서도 소리 안나게 꾸욱꾹 눌르면서 잘라도 결과물만 좋다면야 용서되는 요리로써
거저 힘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되는 요리 같지 않은 요리지요.
비가 추적이는 날 산뜻하니 쏘주 안주로 제 격입니다)
그래서 걸지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 보지만
제 요리가 워낙 실험성이 강해서
집사람은 아예 그릇을 젓가락 사정거리 밖에 떨궈놓고 '너나 많이 먹어라'하듯이 눈길도 주지않고
아이들은 아빠 권위에 못이겨 그러지는 못하지만 몇번 당하고 나서는 배부르다고 그저 웃기만 합니다.
내색은 안하지만 집사람의 그런 표정은 '꼴값 떨고 있네'라는 뜻으로 짐작합니다.
쪼금 왕따 당하는 기분이지요.
(냉장고에 먹다남은 등심이 있다면 간단히 프라이팬에 익혀서
기왕 프라이팬 달궈진 틈에 감자튀김이랑 계란프라이, 양배추야 그냥 숭숭 썰고
즉석 크림 스프까지)
(낙지볶음을 해봤으니 오징어볶음이야 날로 먹는거지요.)
그런 음식채널을 운동 중에 많이 봐설까요?
요즘 들어와 몇번은 저의 집사람이 젓가락을 대는 것 같더니 딸에게
"이거 아빠가 만든 관자졸임인데 맛이 괜찮다."하는 말에
저 그만 뿅 갔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나서도 괜찮을까요?
그러고 보니 거의가 안주거리네요.
그렇습니다.
공처가치고 술 못먹고 머리 나쁜 사람 거의 보질 못했습니다.
IQ, EQ는 물론 특히 JQ(잔머리지수)가 높아야 공처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구요?
다 아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