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_03 둘쨋날 1
모처럼 돈 들이고 제주까지 갔는데 비가 오면 이거 정말 낭팹니다.
저만 있다면 청승을 떨든 비 맞고 거지 꼴을 하고 다니든 별 문제 아닌데
가족들이 딸려 있으니 어떻게 즐겁게 해줘야 할까요?
춤이라도 춰줄까요?
그 시원한 바람과 좋은 경치 놔두고 무슨 랜드, 무슨 박물관으로 돌아야만 하나요?
어찌 됐건 아침에 방에서 꿈지럭거리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옷을 대충 추스려 입고 추적이는 비를 맞으며 근처 이호 해수욕장으로 나갑니다.
빗방울이 팔등을 적셔도 그마저 상쾌하고 비록 투명하고 푸른 바다는 볼 수 없지만
내 눈에는 그 것 또한 고맙고 경이롭습니다.
집게발에 빨간 매니큐어로 화장을 한 이름 모를 게 한 마리도 나처럼 해변 산책 나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일찍 일어나지만 어디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가요?
저희한테는 늦은 시각인 아침 10시에 아침을 해결하는 걸로 일정을 잡아놨지만
별 재촉없이 9시 전에 움직이기 시작하게 되니 그것 만도 다행입니다.
눈을 떴으니 해장을 해야겠지요?
식당 겉모습이나 메뉴판에서 일식집 냄새가 물씬 납니다.
이 집은 개업한 지 별로 되지 않아서 손님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조금 지나니 사람들이 몰려 들어 옵니다.
제주도에서는 풋고추를 거의 볼 수 없고 재배하는 고추가 거의 청양고추 수준이랍니다.
멋모르고 한 입 베어물면 저 같은 사람은 눈물이 날 정도지요.
이 집 탕류는 고기와 건더기가 푸짐합니다.
색깔을 보고 지레 짐작하는 만큼 칼칼하거나 얼큰한 편은 아니고 오히려 달착지근 합니다.
큼직한 선지.
곰탕도 고기가 서울처럼 숫자를 셀 정도가 아니라 주인이 이뻐보일 만큼 넉넉하게 들어 있습니다.
같이 가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여행지가 달라지겠습니다만
저희는 꼬맹이가 끼어있어 역시 꼬맹이 눈높이에 맞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파퓰러 미캐닉스나 사이언스를 보면 미니 기관차를 취미 삼아 만들어 덩치 큰 어른들이 올라타고
즐거워하는 사진을 가끔 보곤 했지요.
저도 그걸 보고 타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으니 꼬맹이야 더 할 나위 없겠지요.
에코랜드라는 곳에서 그런 미니 열차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출발한 기차가 빨간 색이어서 빨강마니어인 꼬맹이가 징징거리긴 했지만 금방 잊어버립니다.
역마다 한번씩 정차해서 숲과 연못을 산책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 보는 경치도 괜찮군요.
단체로 모이기만 하면 시끄럽습니다. 모두들 들뜬 기분이니 그 정도는 참아 줘야지요.
"XX야! 다들 지금 이 기차 타는거야? XX엄마도 탔어?"
드디어 빨간 기차가 들어 옵니다. 꼬맹이 소원 푼거지요.
이런 열차는 한 5대 정도로 대략 20분 간격으로 운행됩니다.
여유롭게 천천히 숲속길을 산책해도 좋을만한 곳이지만
비가 오니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보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요.
거의 한 바퀴 다 돌 때쯤 "우리 한번 더 타볼까?" 그랬더니 이제 됐답니다.
사실 출발역인 종착역 전에서 모두 내리게 해서 더 타볼래야 더 타볼 수도 없습니다.
비자림으로 갑니다. 어디나 활짝 피어있는 수국이 아름답습니다.
비자림은 이번이 3번 째이고 매번 주차장에만 있다가 되돌아 가곤 했는데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경로 몇분이에요?"
하마터면 2명이라 할 뻔 했습니다.
우도 쪽으로 가서 섬구경도 하고 전복죽도 먹고 싶지만
비가 오니 해변으로 나가 비바람에 떨기도 청승맞고 조개캐기도 그렇고 방향을 바꿔 정석항공관으로 갑니다.
일정을 상황에 따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인원이 적은 가족여행의 장점이지요.
정석항공관은 대한항공 비행훈련원이 있는 정석비행장 곁에 있습니다.
보통 이렇게 전시를 해놓으면 계기판들이 다 훼손돼 관람재미를 반감시키기 마련인데
여기는 잘 보존 돼있습니다.
공기를 압축시켜 생긴 추력으로 커다란 빌딩 같은 몸체를 들어 올릴 생각을 하다니
과연 인간 상상력의 끝은 어디까지 일까요?
블랙박스입니다.
서울에서는 아침도 거르고 점심이 되어도 시장기를 못 느끼겠더니
걸신이 들렸는지 때만 되면 배가 고픕니다.
일정에 변화가 있을 것 같아 점심 메뉴는 비워놨었는데,
아침 저녁 메뉴를 다 정해놓았다고 섭섭해하던 사위가
"아버님, 서귀포에 게짬뽕 잘 하는 집과 흑돼지짜장 잘 하는 집이 있는데 어디로 갈까요~" 합니다.
정녕 먹고 싶은 건 많고 둘 다 먹을 순 없으니 밥통이 하나 뿐인 것을 탓해야 하나요?
쿼바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