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스러운 장소에 성(性)스러운 조각이 있다니?
이 글도 사진정리 하던 중 딱히 후기 달 것이 마땅치 않아 묵혀두었던 사진을 뽑아 정리한 것입니다.
2007년도 11월이니 묵혀놓기도 오래 묵혀놓았군요. 이런 게 바로 묵은지 아니겠습니까?
( 전주에서 모악산으로 빠지는 712번 도로에 서있는 귀신사 표지판 )
귀신사는 금산사로 가는 도중 이정표에 나와 있는 이름이 희한하여 들른 절입니다.
鬼神이 아니라 歸信이니 대충 무슨 뜻일지는 짐작이 가시겠지요?
양귀자의 소설 <숨은꽃>의 배경이 된 절이라고 하는데 안내판에 그런 설명이 살짝 들어있어도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법도 한데요.
이 절의 창건 당시 이름은 국신사(國信寺)로 신라시대 화엄십찰의 하나로 지어진 큰 절이었다고 합니다.
화엄십찰은 새로운 통일국가 지배이념이 된 화엄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에 세운 사찰로,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모악산 일대에는 미래불 신앙이 신라정부에 대한 비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우려가 다분’했기 때문에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라로써는 백제유민을 위무하고 ‘학습’을 시키기 위한 다목적 사찰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수겸장이지요.
( 귀신사 대적광전. 단청을 하지도 않고 화려한 팔작지붕도 아니지만 함부로 범접하지못할 멋을 풍깁니다. )
( 그 작은 법당이 꽉 차도록 들어앉은 삼존불 )
( 막상 대적광전 분합문에 비친 그림자가 나의 마음을 더 평온하게 만듭니다. )
경내에는 꽤 큰절이었음을 입증하듯 마당 한켠에 연화대, 주춧돌, 장대석 등이 모여 있는데,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얕은 뒷산에 석탑과 함께 발기된 남근을 등에 지고 있는 사자모양의 돌사자가 있습니다.
성(聖)스러운 장소에 성(性)스러운 조각이 있다니?
이에 대해 ‘불교와 무속이 합쳐진 귀신사의 석수와 남근 조각품은
이곳 사찰명인 국신사(國信寺), 구순사(狗脣寺), 귀신사(歸信寺)의 여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풍수지리에 의해 이곳 지형이 구순혈(狗脣穴, 개의 음부를 상징)이므로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
음란한 기운을 누르면 마을이 평온의 안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 바로 뒤 고목이 있는 언덕배기에 3층석탑이 서있습니다. )
( 마을이 들어오는 전경은 좋은데... 처음엔 사자등에 대나무가 난 줄 알았지요. )
금산사를 들어가다 보면 길가로 나앉은 성문이 하나 보입니다.
절 초입에 웬 성문인지 차에서 내려 안내판에 적힌 글을 보니 견훤의 생애에 대해서 간략히 적혀 있을 뿐
정작 성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설이 없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 말기에는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가뭄과 기근이 심해짐에 따라 농민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합니다.
그 시절 견훤이 무리를 모아 무진주(광주)를 공격하고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이때 견훤은 금산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주위에 성곽을 쌓았는데 그 잔재가 바로 이 성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은 나중에 장남 신검에 의해 이 금산사에 유폐되어 이 성곽은 교도소 담장이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 2007년 당시 사진입니다. 현재 사진을 보니 엄청나던데 제대로 고증이 된건지? )
김봉렬교수는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에서 금산사를 ‘수평과 수직의 어우러짐’,
화엄신앙의 전당인 대적광전과 미륵신앙의 중심인 미륵전을 송대라는 낮은 언덕이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간명하게 표현하였습니다.
( 이렇게 누각 밑으로 진입하는 가람배치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저는 이 부분에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
( 글이 무척 힘이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 내력을 지니고 있군요. )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 통로를 지나면 누각과 계단으로 된 사각프레임 속으로 대적광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열병식을 하듯 늘어선 커다란 기둥과 화려한 가구구조, 잘 다듬은 머릿결처럼 아래로 흘러내려오는 기와골,
거기에 힘 있는 악필법(握筆法-황욱)으로 쓴 대적광전 편액으로 화룡점정, 깔끔한 마무리입니다.
( 그렇게 보제루 밑을 지나 절 마당으로 들어오면 오른 쪽으로 미륵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
(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위치한 방등계단. )
( 그리고 대적광전 )
( 방등계단과 미륵전. 마치 성과 같은 위용을 느끼는 건 저 뿐인지... )
( 방등계단이 중창불사되기 전 송대의 모습입니다. 이 옛 석축의 모습이 제눈에는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올라가보고픈 충동을 일으킵니다.
출처 :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 http://cafe.daum.net/distorted )
보제루를 나서면 시선은 자연히 오른쪽에 솟아있는 미륵전으로 가게 됩니다.
넓은 마당에 안정되게 펼쳐져 담백한 느낌의 대적광전이었다면 미륵전은 평지에 우뚝 솟아 우람한 느낌을 줍니다.
대적광전과 미륵전 사이에는 화강석으로 과장되게 장엄된 듯이 느껴지는 방등계단이 있는데,
1920년대 사료를 보면 방등계단은 흔히 보는 돌로 만들어진 석축 사이로 송대(松臺)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그 위에 오층석탑과 사리탑, 방등계단이 송림 사이에 소롯이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방등계단이 수계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화강석으로 장엄된 석조물들이 대적광전과 미륵전을 너무 압도하고 있는 것 아닌지,
자연스런 흐름을 깨는 것이 아닌지 다시 한 번 옛 사진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미륵전에 봉안된 미륵불은 그 높이만도 미륵불의 얼굴이 2층 대들보에 걸쳐질 정도로 큰 불상인데
어떻게 운반돼서 봉안 되었는 지에서 출발한 단순한 호기심은
어떻게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을 부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 전에는 미륵전이란 현판만 달려 있었고 나중에 용화지회, 대자보전 편액을 걸었습니다. )
( 가운데 미륵불을 중심으로 협시불이 서있습니다. 견훤이 이 미륵불 아래 지하에 유폐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
( 새로 조성되고 있는 미륵불. 1936년 7월 5일 동아일보.
뒷배경 왼쪽에 나무가지가 보이는 것과 조명상태로 보아 야외에서 제작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미륵전에 봉안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습니다. )
현재의 미륵불은 3번째 조성된 것으로써 1934년 2번째 미륵불이 소실될 때에는 좌우에 그 정도로 큰 협시불이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운데 본존불만 감쪽같이 불로 소실되게 되었을까요?
그 당시에 본존불은 밑 빠진 커다란 솥과 같은 형태의 무쇠좌대를 써서 본존불을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이 좌대와 본존불 사이에 틈이 생겨 참배객들이 이 틈에 시주금을 넣었다고 합니다.
아니 불전함에 넣으면 되지 왜 그걸 그 틈새로 집어넣느냐 그 말입니다.
어쨌든, 어느 날 동승이 밤중에 이 시주금을 수습하려고 촛불을 들고 들어갔다가
인화성 강한 소조(塑造)불상의 내부에 불이 붙어 무게를 이기지 못한 미륵불이 앞으로 기울며 무너지고 말아
그나마 협시불은 불에 타지 않고 온전하게 남았다 합니다.
소조불상은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석고를 붙여 형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바싹 마른 목재에 불이 붙은 모양입니다.
이 본존불인 미륵불을 새로 조성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맡게 되었습니다.
김복진은 김팔봉으로 유명한 김기진의 형인데 동경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돌아와 작품활동 중
좌익, 항일운동 혐의로 2번에 걸쳐 옥살이를 하는데 감옥에서 나무로 목불들을 ‘상당량’ 만들고
이것을 형무소 측에서 팔았다 하니 혹시 집안에 손때 묻은 이런 나무불상이 있으면 소홀히 대하지 마시고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대박일지 혹시 압니까?
이렇게 불상을 깍은 이유는 동경미술대학에서 일본 불상조각과 근대조각의 대가인 다까무라와의 만남이 큰 역할을 하였다 합니다.
이미 조선미전(선전)에서 불상습작 등으로 입상경력이 있으니 새로운 불상 조성의 적임자로 가장 유력시 되지 않았을까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이렇게 큰 불상을 어떻게 옮겼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사진을 보면 미륵불은 야외에서 제작이 된 것 같습니다
.
( 진신사리 탑이 있으니 당연히 적멸보궁이 있어야겠지요. )
( 진신사리탑 입니다. )
( 윗 사진과 비교해서 어떤가요? 소박하고 포근한 느낌 아닌가요?
왜 방등계단보다도 송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는지 알만합니다.
출처 :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 http://cafe.daum.net/distorted )
( 적멸보궁 안에 부처님을 모실 자리에는 이렇게 빈 방석만 있고 창을 통해 진신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돼있습니다. )
최완수는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에서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한 뒤
다시 속리산에서 법주사를 미륵대가람으로 중수하게 된 이유로
삼국의 접경지역에 속하는 이 일대에서 계속되는 전쟁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함이었다 하고,
내친 김에 몇 가지를 재미있게 연관 지었습니다.
금산사 미륵장륙상이 김복진에 의해 복원 조성된 것처럼,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진 법주사 미륵장륙상도 1939년 일제가 가혹한 식민통치를 하던 때
김복진에 의해 복원 조성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이런 절망의 순간(일제치하)에 진표율사가 금산사와 법주사에 묻어두었던 미륵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래서 모악산 금산사와 속리산 법주사는 영원히 미륵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라는 멋들어진 결론을 내렸습니다.
( 배가 고프니 헛것이 보이는 모양입니다. 아마 구순혈의 나쁜 기운이 저에게도 미친 것일까요? )
공부를 이만치 했으면 빨리 밥 먹으러 가야겠지요?
오늘은 백반 값으로 한정식처럼 반찬이 10 여 가지가 넘게 나온다는 김제 곰돌이네집으로 향합니다.
밖에는 조용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만원입니다. 가짓수를 세어보니 17가지나 되는군요.
별나게 맛이 있다라고 느끼지는 못했지만 한번 들러 볼만한 집엔 틀림없습니다.
백반값으로 17가지나 맛봤으면 됐지, 다 먹고나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섭하재~
( 밖에는 조용하더니 안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
( 그 당시 1인분에 5천원 지금은 6천원. 지금도 반찬은 거의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