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마라톤 - 너 새벽술 먹자고 부른거지?
몸무게가 한참 나갈 때에는 뛰는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꿈속에선 어찌나 가볍게 나가는지
‘이게 꿈이냐 생시냐’하면 꿈이었지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겁니다.
( 갑비고차 울트라마라톤 대회 . 등록후 배번과 강화쌀을 기념품으로 주고 있습니다. )
“요번만 완주하고 울트라는 이제 끝낼까 해요.”
‘네 나이에 무슨 울트라냐? 관절은 한번 망가지면 끝이다.’라는 나의 충고가 통했을까요?
후배는 이번에 강화에서 열리는 100킬로미터 울트라 마라톤을 끝으로 일반 마라톤만 뛰겠다고 술자리에서 공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으로 끝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이제는 울트라 마라톤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기회가 없어지는 것 같아
나도 한번 가보겠다는 약속을 아무 생각도 없이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같이 가자고 해 토요일 진료를 부랴부랴 마치고 차에 올라타
점심을 어떻게 하겠느냐 물으니 뛰기 2-3시간 전에 짜장면 곱빼기를 먹어야 한다고 아예 메뉴까지 정해놓았습니다.
면 종류를 먹어야 빨리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다나 뭐라나.
나야 아무래도 좋으니 강북강변로를 타기 전에 삼각지 근처에서 간짜장 곱빼기와 띵호와 짜장을 먹고
강화 공설운동장에 도착하니 2시 반.
소집장소인 강화읍 공설운동장에는 느닷없이 2인조 밴드가 나와 뽕짝으로 분위기를 돋우고
벌써 백여명은 넘을 선수들이 운동장 이곳저곳에서 준비를 하느라 여념 없습니다,
마니아들은 마니아들끼리 통하는지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연령은 다양해서 청년부터 심지어 노년으로 보이는 연배까지 다양합니다.
한 여자 분은 분명 만만치 않은 나이일 것 같아 말을 한번 붙여보려다가 따귀가 날라 올까봐 그만둡니다.
저의 여자나이 보는 눈이 별로 신통치 못하거든요.
옛날에 꼬맹이를 데리고 온 여자분께 ‘손주가..’라고 설명을 하는데
난데없이 꼬맹이가 ‘엄마~’하고 외친 후부터는 입에 ‘작꾸’ 꽉, 닫았습니다.
여하튼 허벅지 장딴지 근육들은 대단합니다. 다리만 보면 모든 참가자들의 나이는 영락없이 2-30대입니다.
( 흐렸던 날씨는 점점 구름이 걷혀가고 )
( 시각장애인인 듯한 부부인 모양입니다. 손을 맞잡은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
( 이날 3백명 전후가 모인 것 같습니다 )
점점 출발시간은 다가옵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온몸에 맥이 빠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던데 저들도 그럴까요?
드디어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선두에 순찰차가 경광등을 깜박이고 그 뒤로 줄줄이 건각들이 따라 나섭니다.
저는 뒤따라 가다가 순찰차를 추월하고 일몰이 예상되는 지점으로 미리 갑니다.
제가 플래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이걸 사용하려니 쉽질 않네요.
( 대충 일몰되는 위치로 가니 갯벌에서 꼬맹이가 놀고 있습니다 )
( 기다리는 동안에 구경도 하고 )
( 플래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인증셧을 날려봅니다. 잘 안됩니다. 난리네~ )
( 제일 처음 달려오는 주자입니다 )
어떤 때는 플래시가 동조되었다 안됐다, 몇 번 연습을 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선두 주자가 나타납니다.
예상 외로 듬직한 나이의 주자가 손을 흔들며 지나갑니다.
싸우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방향을 틀고 웃음 짓는 정치인 빰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20킬로 1/5, 20%, 허기, 통증 등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겠지요
( 마라토너들은 모두 탈렌트인지 카메라를 들이대니 잠시 서서 포즈를 취해줍니다 )
( 드디어 후배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
‘오~’ 그래도 우리 후배 선두그룹입니다. 좀 놀랍습니다.
석양을 배경으로 셔터를 눌러봅니다만 결과가 신통치 않습니다.
차에 타고 미리 보아두었던 다음 장소로 가 기다립니다.
차도는 좁고 차댈 데 마땅치 않으니 포인트 정하기 어렵습니다.
새마을도로와 마주 닿는 곳에 차를 주차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해는 점점 내려가 노을은 점점 붉어지고 플래시는 제멋대로 작동하고,
멋진 사진 하나 만들어 주려고 하는데 타인에겐 잘 터지고 후배에겐 안 터지고.
(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급식소입니다 )
( 동호회에서 응원을 나왔습니다 )
급식소에서 간식을 드는 걸 보고 40.5킬로 지점인 동막해수욕장으로 가서
저도 간단히 요기를 하고 후배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강화도, 정말 펜션들 많습니다.
울트라 마라톤 완주한 사람들 후기를 보니 고통, 자신과의 싸움, 길 건너 보이는 모텔 네온사인들,
개구리 울음소리 들이 대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품목이었습니다.
마라톤 코스가 해안도로여서인지 요소요소 펜션과 꽉 들어찬 자동차들. 후기에 나온 게 맞습니다.
( 40킬로 지점에 동막해수욕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요기나 좀 해야겠습니다 )
( 해물순두부 . 사람이 많으니 잊어버렸던 모양입니다. 밥을 1/3 먹고 순두부가 나오길 기다렸습니다 )
( 음식점도 많고 펜션도 많고 모텔도 많고... )
동막해수욕장으로 가니 별천지입니다.
해변에서는 폭죽 터뜨리느라 정신없고 음식점들은 사람들로 벅적입니다.
조개구이집으로 들어가 해물순두부 하나 시킵니다.
저녁 때 남들은 회 먹고 새우구이 먹고 조개구이 먹는데 일반 식사를 시키니 쉽게 나올 리 없지요.
밥을 거의 다 먹어 갈 무렵 밖에서는 격려의 박수 소리와 함께 마라토너들이 한둘 지나가기 시작합니다.
40.5킬로미터면 풀코스 마라톤 완주지점인데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거 참 이상합니다. 100킬로 울트라마라톤이라 하니까
나까지 40 킬로? 그게 별거 아니라고 느끼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주최 측에서 출발할 때 ‘즐기라’는 말을 한 모양입니다.
물론 느슨하기는 하지만 지금쯤 탈진한 사람도 생겨야 제 입장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지고 ‘
자신과의 싸움’에 걸맞는 사진도 나오고 할 텐데 영 그런 장면이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외입니다. 청년층이 선두그룹을 유지할 것으로 짐작했지만 오히려 선두그룹은 중장년층이 더 눈에 띕니다. 군대에서 완전군장 행군이나 산악구보를 많이 해선가요? 힘들어 하는 사람도 많지만 뛰면서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을까요? 부부인 듯 손을 맞잡고 뛰는 사람, 대여섯명이 같이 뛰는 사람, 전에 봤던 마라톤대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 반달이 휘엉청 떠있는데... )
편의점 의자를 하나 끌어다 사진 찍으며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다 아무래도 놓친 것 같아 전화를 해보니 벌써 지나쳤답니다.
50킬로지점에 있는 급식소까지 비상등을 켜고 갑니다.
지방도로라고 하지만 한밤중에 유난히 노폭이 좁아 마라토너들이 위험해보입니다.
( 동막에서 한참 기다리다 안와서 전화하니 벌써 통과했답니다. )
( 50킬로 지점의 급식소 )
( 미역국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
급식소에 도착해서 5분 정도 기다리니 들어옵니다. 물로 얼굴을 씻더니 이만 가잡니다.
맥 빠집니다.
허리가 좀 안 좋다던 말은 얼핏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좀 아쉽습니다.
개구리 소리도 찍어야 하고 자신과의 싸움에 알맞을 칠흑 같은 어둠도 다음 코스에 나올 것 같고
완주 후 주자들의 모습도 담아야 하는데...
나는 이제야 워밍업이 되고 막 재미있어진다고 하니 그럼 완주하겠답니다.
허~ 나 때문에 몸에 이상이 오면 안 되니 고민입니다. 결국 철수하기로 합니다.
비록 반 정도밖에 함께 하진 못했지만 완주를 하고나면 그 성취감은 대단할 것 같습니다.
결국 마지막이라던 울트라는 다음에 다시 한 번 연장될 것이고요. 다 못한 아쉬움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군요.
( 이 사람, 새벽술 먹으려고 나를 부른건지, 마라톤 구경시켜줄려고 나를 부른건지 아직도 진의파악을 못하고 있는데 얼굴표정을 보면 제가 낚인 기분이 많이 듭니다. )
귀경하는 길에 서울에서 쏘주 한잔하잡니다.
새벽에 술이 아직도 덜 깨 해롱대는 것들 보고 속으로 흉을 봤는데 새벽에 한잔 해?
아무래도 제가 낚인 것 같습니다.
( 반복되는 마라톤대회와 연습으로 후배의 엄지와 새끼 발톱은 이미 나갔고 오늘은 검지 발톱이 무척 아프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