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가 집떠나면 개고생?
‘마누라’가 집 떠나면 개고생?
집사람이 여고동창들과 여행을 떠났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어 일상에 무슨 불편이 있겠나 했는데, 적응력도 나이에 따라 점점 약해지는 모양입니다.
전에는 혼자 밥도 잘 차려먹곤 했는데 밥물을 잘못 봐
회심의 콩나물밥이 죽이 되기 직전까지 가서 꾸역꾸역 먹고나니 그 짓거리도 엄두가 안 납니다.
그래서 맛맛으로 먹는 건 포기하고 햇반시리즈로 쇠고기 300그램 사서 불고기와 햇반,
골뱅이캔 따서 골뱅이 파무침과 햇반, 참치 양파 샐러드를 만들어 햇반과 함께 먹어보기도 하지만
김치를 덜어내기 귀찮아 1식1찬으로 먹으니 그것도 사람 꼴이 말이 아닙니다.
누구는 ‘마누라’가 여행 떠나면 허리띠 풀고 술 먹을 기회가 왔다고 좋아하는데,
막상 그 기회가 와서 젓가락 하나 더 놓고 어떻게 저녁 한 끼 때워볼까 이리저리 집적대보지만,
치밀하게 계획 세워놓은 게 아니니 이게 꼭 평일에 휴가 나온 군인과 같은 처량한 신세라
남 시간 없다는데 한번 툇자 맞고 나면 영 전화 걸 기분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불러주는데 없나 하지만 그렇게 전화질 해대던 친구도 내가 필요로 할 때는 영 입질이 오질 않습니다.
혼자서 밥먹기 레벨테스트라는 것을 보면 레벨1은 편의점에서 라면먹기부터 레벨9의 술집에서 혼자 술 먹기까지가 있는데
나의 경우는 ‘으흠~’ 레벨9의 경지까지는 도달해있긴 하지만 이거 영 모양이 좋질 않고,
제일 망설여지는 건 혼자서 먹을 밥겸 안주가 없는 게 큰 고민입니다.
흔히 음식점 벽에 걸린 메뉴를 보면 점심메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점심이라는 것은 한 끼 때우는 음식이지 안주거리로는 안 된다는 ‘괘씸한’ 뜻이지요.
그러나 고기집도 1인분은 안되고 일식집도 일본식 선술집처럼 1인분을 시키면 ‘꼴값 떠네’하는 것처럼 눈총을 받으니
돼지처럼 2인분 시켜놓고 느긋하게 혼자서 술 한 잔할 뱃장은 아직 안됩니다.
이럴 때 허름한 술집의 술국이라는 메뉴가 절실하지만 어디 그런 것 내놓는 집이 흔한가요?
그래서 ‘왕’갈비탕이나 우족탕 같은 것을 하나 시켜 안주 삼아 먹어보는데,
서면 엉덩이라도 끼고 걸터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길이가 짧게 느껴지는 야간완행열차 좌석처럼,
혼자 먹는 안주로는 꼭 한 두 점 모자라고, 중국집에서 요리를 시켜먹자니 밥이 없는 것처럼
음식점에서 혼자 먹게 되면, 다른 사람 눈치보다도 홀아비 메뉴가 없어 그게 오히려 고민입니다.
그날도 그렇게 무얼로 저녁 한 끼를 때울까 망설이면서 차안에서 궁리하다 집까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집 대문 쪽으로 걸어오다 보니 간혹 식구들과 갔던 고기마을이란 식당이 눈에 띕니다.
보통 때는 고기만 먹던 곳이라 끼니를 때울 곳으로 생각도 안했던 데인데
불현 듯 옆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이 양곰탕을 시켜먹던 게 생각납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왜 오늘은 혼자 오셨수’하는 눈빛입니다.
메뉴판을 보니 양곰탕 6천, 도가니탕 8천입니다. ‘8천원짜리가 건더기가 그래도 좀 많겠지’,
도가니탕을 시키고는 아줌마가 뭘 물어보지 못하게 신문을 쫘악 펼치고 독서 삼매경에 짐짓 빠져봅니다.
쏘주 빨간 것도 하나 추가하니, ‘오~~’ 맛배기 간천엽까지 하나 갖다 줍니다.
전에 왔을 때 앞집에 산다고 했더니 그걸 기억했던 모양이거나 꼬라지를 보고 가엽게 여겨 갖다 준 것이겠지요.
이로써 반주 안주까지 딱 들어맞았습니다.
서대문 대성집 도가니탕을 연상하고 시킨 도가니탕은 영판 다릅니다.
양이니 잡고기가 없이 오로지 도가니만 충실하게 들어가서 관절염이 있는 사람에게는 치료약으로 아주 좋겠지만
안주와 밥으로 먹긴 너무 한가지라 약간 지루합니다.
그러나 저녁 한 끼 이렇게 때웠다는 게 어딥니까? 내 손으로 해먹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요.
(다음날 가서 먹은 양곰탕. 건더기 양은 적으나 훨씬 부드럽습니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라는 말처럼 그럭저럭 뭉개니 집사람은 내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집에서 받아보는 밥상, 아들 밥상보다 찬은 적어도 마음은 섭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며칠 지나고 나면 간사한 남편은 또 돼먹지 않은 거드름을 피우며 소파에 너부러질지도 모르지만,
마누라가 공기와 같은 ‘귀한’ 존재라는 걸 잊은 건 '절대로' 아니지요.
(건더기가 적을 땐 아쉬운대로 김치도 꽤 괜찮은 안주지요.)
그 걸로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구요?
아! 마누라라는 단어에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호칭이 아니라
고운 정 미운 정 다 섞인 지칭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