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보다 배꼽이 큰 매운탕-포항수산
귀중한 식량을 축낸다하여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망할 때까지 금주령을 시행했다하지만
특히 영조의 금주령은 더욱 엄격하고 벌칙은 가혹했다합니다.
아마 영조께서도 일사불란한 것을 좋아하셨는지 ‘토’다는 걸 무척 싫어하셨나 봅니다.
먹지 말라는 술 한 잔 걸지게 마신 개구리가 좀 잘못을 하긴 했지만
돌(엄명) 하나에 생명이 왔다갔다 하니 무척 비싼 대가를 치루는 거지요.
정조대가 돼야 금주령이 완화되며 술집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는데,
이 때 술집의 변화에 대해 채제공이 쓴 일성록에서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을 말하더라도, 매주가의 술안주는 김치와 자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백성의 습속이 점차 교묘해지면서, 신기한 술 이름을 내기에 힘써
현방(懸房:왕실ㆍ귀족ㆍ관아ㆍ군문에 고기를 공급하던 가게, 매달 懸-고기를 매달고 파는 집. 푸줏간)의 쇠고기나
시전(市廛)의 생선을 따질 것 없이 태반이 술안주로 들어갑니다....”
<강명관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 참조>
이렇게 곡물은 고사하고 귀중한 쇠고기와 생선까지 술안주로 허비되는 것을 탄식했지만,
그렇다고 술안주가 풍부해진 오늘날에도 막상 한잔하면서 좀 새로운 걸로 먹어 볼라치면 딱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배때기가 불러져서 그런 모양이지요? 회보다도 매운탕을 잘한다는 가락동 포항수산이라는 곳이 그런 곳입니다.
매번 그저 그런 소금구이나 회, 탕이니 하다가 매운탕이 좀 이색적이라 하니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지요.
아마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평범한 매운탕으로는 승부를 걸 수 없어 변형을 한 것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전에는 매운탕이라고 해도 조리법을 보면 ‘ 도미는 토막을 내어 간장과 생강즙에 절여 밀가루와 달걀을 풀어 전 지지듯 지진다.
멸치국물에 간장과 초고추장으로 간을 맞추고 여기에 파, 애호박을 썰어넣고 생강 마늘을 다져 넣은 후
생선 지진 것을 퍼 넣고 붉은 고추와 풋고추 채 썬 것을 넣는다....’(경향신문 1960.6.21.)
지금처럼 고춧가루를 푹! 떠 넣는 것이 아니라 고추장 풀은 국물에 생선 밀가루 옷 입혀 지진 것을 집어넣는데,
생선을 지져 넣는 것도 이색적이지만 고추장으로 양념하는 것도 지금과 많이 다릅니다.
하긴 2008년 조도에 갔을 때 먹었던 우럭(매운)탕은 된장을 풀어 탕을 끓였는데
잘 익은 배추김치 한가지만으로도 너무 맛있게 먹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조도여행기 : "너거덜 입과 눈은 인자부터 나가 팍팍 책임저불꺼시여!" - 남도여행기 전편 (조도)
그럼 지금처럼 날생선에 고춧가루를 넣어 끓이는 매운탕은 언제부터일까요?
제가 찾아 본 바로는 1976년 10월 22일자 기사가 처음이니 아마 70년대 초반이 아닐까 합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푼 국물에 쏘가리를 넣고 뼈가 무를 때까지 끓인다...’
입맛이야 변덕스러운 것이니 아마 조리법도 패션처럼 되풀이된다면
고추장이나 된장을 풀어 끓여주는 생선탕이 다시 유행할 지도 모르지요.
가락시장에서 모임장소인 포항수산까지 가는 길은 청과물시장을 질러가야 하는데,
먹는다는 기대감이 없었다면 벌써 뒤돌아 갈 길입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불광동에 사는 친구입니다. 그 먼데서도 왔으니 저야 찍소리 하질 말아야지요.
수산시장 내에 양념집이 아닌 횟집이 구획을 이루고 몇 집 모여 있는데 제일 구석 집입니다.
가격이 시세보다는 조금 비싼 듯한데 밑반찬이 나오는 걸 고려한다면 적당한 가격 같습니다.
딱히 입에 맞는 어종이 없어 선택은 뒷사람에게 미루고 자리로 가니 미리 밑반찬을 깔아놓은 상에는 한사람이 벌써 도착했습니다.
얼핏 삶은 새우와 멍게, 과메기, 꼬막이 눈에 띕니다.
우선 맥주로 입가심하고 있으니 이젠 예비역 역전의 용사(?)들이 하나 둘씩 모입니다.
회비를 관리하는 실세 친구가 강성돔과 광어를 시켰습니다.
시키는 게 많아야 서비스 안주도 많이 들어오는 게 이치이긴 하지만 소문과 달리 딱 그만치만 주는 것 같아 좀 아쉽습니다.
아, 같이 나온 양념을 씻어낸 묵은지와 간장게장은 입맛을 당깁니다.
드디어 매운탕이 나왔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미리 팔팔 끓인 듯한 빨간 매운탕에 새하얀 다리를 다소곳이 들여놓고 있는 낙지, 그 위에 듬뿍 올린 다진 마늘,
툭툭 썰어넣은 대파는 저절로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하게 만듭니다.
칼칼한 매운 맛은 생각보다 덜한데 숟가락에 건져 올라오는 알은 곱이 밀려나온 곱창처럼 푸짐하니 입맛을 돋웁니다.
해물탕이라면 찾아서 먹는 편이 아니지만
이렇게 매운탕에 낙지와 알이 들어가니 먹는 즐거움이 배가된다는 걸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매운탕을 봐서는 다음에 한 번 더 오고 싶은데 청과물시장을 횡단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질 않지만
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니 또 지나봐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