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탐욕의 밤이 지나고 나면
그 추운 겨울을 다 보내고 따뜻한 봄이 오는 길목에 그만 코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픈 건 별로 없는데 웬 콧물이 그리 나오는지.
매월 첫 수요일에 만나는 고등동창들과의 모임 장소 선정도 감기가 걸리니 그리 흥이 돋질 않고 귀찮기만 합니다.
‘어디 입에 착 달라붙는 집 없어?’ 그러다 충무로에 고흥만이라는 음식점이 눈에 띕니다.
벌교에서 먹었던 꼬막정식이 슬라이드처럼 스치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식욕이 돋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식욕이 돋게 되는 것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그나저나 식욕이 돋는 걸 보니 감기가 떨어지려나?’
( 벌교에서 먹은 상차림보다는 단촐하지만 서울에서 남도냄새를 맡아본다는 게 어딥니까? )
( 너무 감격해서 손이 떨렸는가? )
( 주문 받자마자 버무렸는지 무채가 사각거립니다. )
( 숨쉴 틈 없이 들어옵니다. )
퇴계로 4가 제일병원과 동대 후문 골목은 예전의 한산한 골목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머리 속에는 온통 먹을 것만 들어있는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먹을거리가 다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좁은 골목에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서니 자리가 모두 예약되었습니다.
걸지게 사투리를 구사하는 여사장께 특정식과 정식의 차이가 무어냐 물으니,
특정식에는 과메기, 홍어 삼합, 굴전이 더 나온답니다.
처음 가는 집이라 얼마나 나올지 모르니 일단 정식을 시킵니다.
(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듯 속살을 드러냅니다. )
시키자마자 좌르륵 깔리는 밑반찬들에 양념꼬막이 먼저 나옵니다.
짜지나 않을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그리 짜지 않고 두툼한 양념 맛이 느껴집니다.
마치 준비나 한 듯 꼬막무침, 꼬막전, 삶은 꼬막이 허벌나게 빨리 나오는데
‘얼른 먹고 자리 빼라’는 뜻이냐 여사장께 물으니 그건 아니고 옆방에 단체손님이 있어 미리 준비해놓아 빨리 나오는 거랍니다.
전에 인사동 여자만에서 꼬막이 덜 삶아져 비리다고 하던 친구도 ‘이거 비싼 참꼬막’이라며 정신없이 먹습니다.
이윽고 서대와 양대 구이가 나옵니다.
좀 식은 듯하고 내 입맛에는 심심하지만 안주빨이 서니 없어서 못 먹을 지경입니다.
허겁지겁 먹었는데도 아직도 양이 안차는 듯 모두 빈 접시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며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느닷없이 여사장이 ‘잠쉬 검문이 있게쑵니다.’며 빈 접시들을 치우고 매생이국과 밥을 내옵니다.
( "잠쉬 검무니 이께쑵니다." )
국그릇이 작아 국그릇과 밥그릇이 뒤 바뀌었다고 트집 잡으며
반찬으로 삶은 꼬막 더 내놓으라는 반 ‘협박’에
쥔장은 생글대며 삶은 꼬막 대신 양념꼬막과 갈치속젓을 대령합니다.
붐비지 않는 시간이 없을 듯싶지만 다음에는 좀 느긋하게 간장게장과 꼬막탕수를 곁들여 먹어봐야겠습니다.
( 갈치속젓과 흰밥 )
사랑하는 이와의 입맞춤은 달디 달아서 배부른 줄 모른 탓일까요?
보통은 일차에서 끝나지만 마침표를 안 찍은 기분이 들어
근처 제 분수를 모르고 가격이 엄청 올라버린 냉면을 뿌리치고
을지로 4가 춘천막국수 집으로 향합니다.
‘여기 닭무침 세접시!’
그걸 어떻게 먹느냐던 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싹 비우고 사리까지 2개 더 시켜 맛있게 비벼먹고
만두까지 입가심으로 한 접시 먹고야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탐욕으로 얼룩진 오늘은 싹 잊어버리고 다시 점잖은 얼굴로 뻔뻔하게 하루를 살아갈 겁니다.
충무로 고흥만 02-2275-4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