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궁녀라고요? 1 - 부소산성
부여라 하면 우리 같은 보통사람에게는 부소산성에 세워진 무명시비에 새긴
'... 백마강 맑은 물 흐르는 곳 / 낙화암 절벽이 솟았는데
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 길고 긴 원한을 멈췄으리'라는 시구절처럼
반사적으로 삼천 궁녀, 낙화암, 황음, 의자왕... 등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자부심을 가져야할 역사 유적지에 이따위 기념시비가 뻐젓이 세워져 있어도
아무도 부끄러워 하지 않으니 어려서 배운 '학습'의 효과는 소름돋을 정도입니다.
그런 백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데는 몽촌토성, 풍납토성, 무령왕릉,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등이 촉매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백제에 관한 유적과
유물이 상대적으로 적고 우리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겠지요.
부여야 그 옛날 옛날 중학교 수학여행을 비롯하여 몇 번 가보았지만, 지난 번 공주를
가보고 나서야 백제라는 나라가 그렇게 감상적으로 만만하게 볼 나라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패망국의 마지막 왕으로써 멸망의 최종 책임이 의자왕에 있다고는 하나
선데이서울 기사처럼 삼천궁녀를 거느리며 사치와 방탕을 일삼다가 맥없이 항복하고
볼모로 잡혀간 그런 군주였다고?
그런 군주가 나제동맹을 깨뜨린 신라와의 교전에서 성왕이 참수될 지경으로 참패를
당하고 나서도 근 80 여년씩이나 지난 후 의자왕이 신라 경주를 지척에 두고 있는
지금의 합천지역인 대야성 전투에서 설욕전을 승리로 이끌어?
최소한 죽고나서 붙이는 왕의 이름에 의로울 의(義)와 자애로울 자(慈)가 붙었는데
그가 무능한 왕이었으면 그런 글자를 붙일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이번에 무지렁이에게 그런 실마리라도 풀어 볼 행운이라도 걸려들까 하고
부소산성, 정림사지, 부여박물관을 천천히 돌아 보기로 했습니다.
새벽에 헬스에서 샤워나 하고 가려다 토요일 고속도로가 막힐 것 같아 남부터미널에서
출발 5분 전에 가까스로 부여로 가는 첫차를 탑니다. 부여에 내리니 9시 조금 지났습니다.
그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이라곤 나홀로 여행자를 군소리 없이 반겨주는 순대국집.
시장 내 <시골 순대>라고 써붙인 집으로 들어가 순대국을 시킵니다. 역시 서울보다
투박해 순대 특유 맛이 더 나는군요. 순대국보다는 직접 담군 깍두기가 일품입니다.
우선 스을슬 걸어서 부소산성으로 갑니다. 옛날 입구 쪽으로 부여객사가 있습니다.
가운데 맞배건물을 중심으로 단을 낮춰 날개를 단듯 날렵한 팔작지붕의 익실(翼室)이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근이 관북리 유적지입니다. 백제가 도읍을 옮긴 538-660 사비시대 왕궁터랍니다.
대형 전각 건물지, 연못, 목곽저장고, 공방시설, 도로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답니다.
커다란 주초가 보이는 대형 전각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크다한 들 그 당시
시각으로써 크다는 것이지 삼천궁녀가 기거할만큼 큰 궁터는 당연히 아니지요.
출토된 수부(首府)명 기와, 5부(府)명 기와는 이곳이 사비시대 왕궁및 중요기관이 있었던
지역임을 알려줍니다.
처음엔 하필이면 말썽 많은 건물을 복제해서 문화재 사업소로 쓰나 생각했습니다.
김수근이 설계한 옛 부여박물관은 훨씬 규모가 더 큰 걸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일본의 이세(伊勢)신궁과 닮았다고 말도 많았던 건축물입니다.
아니라 반박해도 사실 저에겐 사무라이 갑옷과 투구가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어느 새 가을이 느껴집니다. 경로는 무료라니 경로증 대신 '수고하십니다~'하며
모자 벗고 노란 감과 같은 민둥산 대머리를 들이밀고 애교부려 볼까요?
버스 타고 오면서도 금강(백마강) 주변에 안개가 자욱히 껴서 강쪽은 구경도
못하겠거니 염려했는데 햇볕에 안개가 서서히 걷혀 갑니다.
확성기 소리나 좀 죽이고 운동하시지... 헬스클럽에서도 난청을 유발시킬듯한 '신나는'
음악이 없으면 운동을 못하겠다는 분들이 꼭 있지요? 그래서 전 휴지를 적셔 귀마개를
합니다. 건강도 좋지만 유적지에서 간드러진 가요곡은 제발~
낙화암 백화정. 花, 花, 이젠 삼천 궁녀 딱지는 좀 떼어 주면 안될까?
그런데 백화정의 꽃 화는 궁녀를 뜻하는 게 아니라 시귀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항상 무언가 기대를 하고 오지만 허탈해지는 고란사
저 풀이 고란초가 아니겠지요? 그 옆에 사진이라도 붙여주는 센스는?
부여군 임천면 관아 문루를 이곳으로 옮기고 사자루라 이름지었다고 하는데...
문루에 올라가 보니 어디서 많이 본듯한 충량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충량은 아래 대들보 위에 수직으로 걸쳐진 가구구조물로 용의 문양이 그려졌습니다.
어디서 봤는고 하니 나주객사 문루 정수루와 비슷합니다.
저기 대들보 위로 용머리를 하고 있는 충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이 문루 바로 앞에 여러 개의 솥을 걸어 놓고 영업하는 유명한 나주곰탕집이 있는데
스님이 점잖게 내 앞에 앉아서 영양보충을 하셔서 몸둘 바 몰랐다는 전설이...
<할배요 내가 와쏘: http://blog.daum.net/fotomani/69976 >
땅바닥을 기는 칡덩굴조차 망국의 슬픈 빛을 띄고 있는 듯
토요일 현장학습이 많은 모양이지요? 초등, 유치원 원아들이 많습니다.
궁녀사-삼천궁녀를 아예 정사로 만들자는 뜻인가요? ㅉ.- 들어가는 길 옆에
꽃무릇이 피어 있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꽃무릇을 보러 일부러 불갑사도 가는데...
나뭇이파리가 없어 슬퍼도 내가 눈을 실컷 맞춰 너를 즐겁게 해주리~
부소산성은 낮은 산인데도 불구하고 물을 많이 품고 있습니다.
식수대의 수돗물은 무슨 약초 맛 같은 맛이 났는데
여기 약수 정말 맛있다는 신음 소리가 절로 납니다.
그래서 떠가지고 가지 말고 음미하며 마시기만 하라는갑습니다.
요번에 다닌 길은 성벽길이 아니고 산책로라 성벽을 잘 보지 못했는데
부소산성은 사비로 천도하고 축성한 성이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축성되었다 합니다.
백제의 축성방식은 판축식으로 커다란 상자 속에 진흙을 다져 만든 육면체를
쌓는 방식이었다 합니다. 풍납토성 발굴시 축성법을 알기 위해 일부를 절단하고
다시 흙을 덮었는데 복토한 부분만 주저앉았을 정도로 우수한 공법이었다 합니다.
풍납토성은 얕은 언덕처럼 보여 '애개~'할 지 모르겠으나 성곽 안팎으로 흙이 퇴적돼
쌓여 그렇지, 원래는 높이 11 m 정도로 아파트 4층 높이 정도 되었다 합니다.
삼충사. 5천의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5만의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운 계백장군,
백강에서 당의 수군을 막고 탄현(합천)에서 신라군을 막아야 한다던 좌평 흥수,
의자왕이 연승으로 자만에 빠져있을 때 자만하지 말고 나당의 침공에 대비해야한다고
고언을 하여 옥살이 끝에 목숨을 다하고만 성충 이 세분을 기리고자 만든 사당.
부소산성 정문인 부소산문.
엊그제도 공주 공산성 발굴시 옷칠갑옷, 각종 무기류, 인골등이 출토되는 것을 보고
의자왕이 마지막에 이 공산성으로 옮겨와 마지막 항거를 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접했습니다. 세종도 '신라가 포석정에서 망하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망한 것이
모두 술때문이다'라고 경종을 울렸다는데 패망국이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마는
패망의 역사라는 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걸 쉽게 보지 않던가요?
그러니 이젠 최소한 낙화암이니 삼천궁녀니 포석정이니 술잔치니
말도 안되는 소리들은 이제 굿바이~
닥다리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