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 - 철수네고기집
전에 수락산에 올라가며 친구와 만나기로 한 곳이 당고개역이었습니다.
당고개역이나 상계역이나 역주변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고달픈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딱 한잔하기 좋은 곳,
산에서 내려와 지친 팔다리 알코홀 기운으로 원기 회복하는 곳,
술집에선 큰소리 쳐보지만 막상 자리를 일어서면
니나 내나 그저 고만고만한 인생임을 허무하게 깨닫는 곳,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러지 말고 차 대놓고 편안하게 먹지요.'
마침 상계동에 사시는 오디오샵을 하는 고사장님과 소주 한잔하기로 하고
장소를 정한 곳이 철수네 고깃집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참에 상계동 선술집 분위기에 젖어보고, 이름이 그럴 듯 해서요.
이거 혹시 선거법 위반 아닌가요?
상계역에서 내려다 본 먹자골목입니다. 흰바지 입은 여인네가 서있으니 분위기가 야릇합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저기에서 잠시만 서있어도 무수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은행동 같은 곳을 강남에 비유할 정도라고는 하지만
이 상계지역도 예전엔 서울시 철거민 집단이주 지역 중에 하나였습니다.
일터가 시내인 사람들을 무리하게 이주를 시키다보니 1970년도에는 청량리에서 버스가 없어
귀가를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경향신문 1970. 6. 22)
먹자골목에 책방? 이런 곳에서 책방을 보다니? 허를 찔렸습니다.
드디어 들어왔습니다.
인테리어 독특합니다. 주름잡힌 함석판에 빨래판 메뉴.
갑자기 저거 먹으면 제 배의 빨래판에 비계가 끼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체인점이냐 물으니 아니랍니다.
웬 뻔데기?
돌소금이 맘에 듭니다.
돼지 생고기 모듬. 삼겹살, 목살, 항정살입니다.
선도가 괜찮습니다.
얼려 나오는 소주.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를 놀라게 해주는게 많군요. 서리가 끼기 시작합니다.
이런 잔이 있었나요? 소맥도 아니고 쏘맥입니다.
'쏘'자 위에 점이 있으니 '양복입은 신사'가 팔을 벌리고 서있는 것 같네요.
술먹는 사람에겐 이래저래 모든 게 술먹을 구실이 됩니다.
먹다보니 이 된장 풋고추가 느끼한 맛을 덜어 줍니다.
갑자기 제주에서 흑돼지구이와 함께 먹던 멜젖이 생각납니다.
염치 불구하고 부탁하니 멜젓은 없다며 대신 새우젓을 갖다 줍니다.
도시락을 하나 시킵니다.
흔들어야지요.
된장찌개 대신 나오는 우거지국, 푹 끓여 부드러운 스지와 우거지가 구이와 잘 어울립니다.
선술집이지만 깨끗하고 가격 맘에 들고 아줌마 친절하고 끝이 없는 야그가 있고
술맛 돋워 주는 비도 오고,
비가 오는 걸 멀리서 어떻게 찍느냐고요?
이렇게 찍지요.
조금만 먹겠다 해놓고 분위기에 휩쓸려 어제 엄청 먹었습니다.
아침 해장으로 홍합죽을 끓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