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영풍문고에 갔다가 여행기가 놓여 있는 매대에 엉뚱하게 술통이라는 제목의 책이 비죽 나와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구겨진 포장지를 배경으로 술통이라 적혀 있으니 대충 내용이 짐작되긴 하지만 왜 술통인가?
술통은 취생록(醉生錄)이란 제목으로 장승욱이라는 작가가 PAPER란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감성을 자극하는구겨진 종이표지와 요즘 책답지 않게 갱지에 가까운 지질,
더구나 1만5천원 전후의 천편일률적인 책들 중에서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9천8백원,
금상첨화로 444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책.
수학의 정석 제1장 수와 식의 계산 이후 모든 페이지가 깨끗했었다는 공감이 가는 고백에서부터 먹물끼를 좌악 뺀,
언젠가 우리가 겪었던 그런 담담한 체험들은 책을 잡고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어느새 444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술을 하면서 겪는 크고 작은 사고, 깨고 나면 후회가 되는 언행들,
아니 어떤 때는 전혀 기억조차 못해 몇날 며칠이 걸려 끊어진 필름조각들을 맞추어 보고
얼마나 낯 뜨거웠던 적이 많았었는지는 술꾼의 흔하디 흔한 공통사겠지요.
“너에게 술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그러나 이제 막 술을 배우기 시작한 너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러니 이 순간 이후로 내가 네 대신 술을 끊겠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술을 마실 때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것, 이것뿐이다.”
대취해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리고 사고치는 아들과
어느 날 소주 두병을 아무 말 없이 대작하고 마지막 잔을 비우며 아버지가 하는 말씀,
멋있다.....
느닷없이 왜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가 하니 이 가난한 작가가 그래도 변변한 안주로 먹었던 것이 홍어이기 때문입니다.
뭘로 들겠냐고 의향을 물었던 후배가 이미 홍어집에 자리잡고 앉아서 전화를 건 것이기에 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술통이 떠오른 오늘의 홍어는 왠지 더 땅길 것 같습니다.
창동역 앞에 있는 목포홍탁이라는 이집은 삼겹살을 시키면 깡장을 주곤해서 자주 들리던 집으로
이제는 종목이 바뀌긴 했지만 홍어삼합+홍어찜, 홍어삼합+홍어탕 식으로 세트메뉴를 비교적 저렴한 값으로 내는 집입니다.
만만한 게 홍어좆이라지만 홍어값은 만만한 게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이야 사람이 좋아서 국내산이든 칠레산이든 가리지 않고 코를 쏘는 홍어 냄새만 찐하게 나면
그저 ‘어서 옵쇼’하며 덮석 받아먹어서 나에게 술 사주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안겨주지만,
홍어집에 가서 서비스로 홍어코를 얻어먹지 못하면 못내 섭섭합니다.
삼합이라지만 홍어, 삼겹살, 묵은지 외에도 굴과 배춧닢이 같이 딸려 나옵니다.
뱃속 소화기관이 어디에 분포되어 있는 지 조금 알게 될 즈음 홍어찜이 나옵니다.
‘어흐~’하며 후배가 달려듭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아는데 어찌 내가 좋아하는 홍어탕이 들어가 있는 세트메뉴를 시키겠습니까?
그래도 홍어탕에 대한 미련은 떨쳐 버릴 수 없는데 지난번에는 못 봤던 작은 쪽지가 주메뉴판 아래 붙어 있습니다.
‘삼합 드신 분에 한해서 홍어탕 5천원’
그래도 아쉬워 맛만 보게 서비스로 조금만 달라니
홍어탕은 주문 들어오면 새로 끓이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답니다.
좀 괘씸하긴 하지만 푸짐하게 끓여 나오는 홍어탕을 보니 간사하게 마음이 풀어지고 맙니다.
‘어흐~ 취!’
제 감탄사입니다. ‘취!’는 뭐냐고요?
절절 끓는 거품이 좀 내려앉자마자 성급하게 한 숟갈 푸자마자 입에 집어넣다
코를 쏘는 암모니아 냄새가 그만 기도를 간질여 입안의 내용물이 앞사람에게 튀고만 겁니다.
고형물이 없어서 그래도 다행이긴 하지만 이런 불상사가 @#$%...
사람의 인품은 바로 이럴 때 나타나는 겁니다.
앞에 앉아 있던 후배‘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휴지로 얼굴을 닦더니 온화하게 홍어탕을 뜹니다.
마치 지가 선배처럼...
‘아~~~ 홍어좆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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