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자리 2번 맞쬬?”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속초가는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았더니
1번 좌석표를 갖고 있던 20 전후의 아가씨가 나에게 묻는 말입니다.
주중에 안 좋은 일로 시달려 집사람에게 바람이나 쐬러 함께 가자했더니 몸이 불편해서 못가겠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내친 김에 동서울로 나가 버스를 탔더니 이 모양 이 꼴입니다.
기분 좋은 꼴은 못 볼모양입니다. 창 쪽으로 자리를 바꿔줄려다 그냥 그대로 갑니다.
전에는 경춘 고속도로가 토요일 오후면 막히더니 오늘은 그런대로 막힘없이 잘 나갑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2시간 30분이면 정말 빨라진 거지요.
속초로 오게 된 것은 사진파일을 정리하다가
친구와 둘이 강릉에 내려가 회를 먹던 사진을 보고 그만 발동이 걸려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주행시간 짧지 기분도 울적하지...
문자를 넣었더니 한 사람은 분당에 있고 또 한 사람은 오전부터 차 고치느라 매달리고 있답니다.
‘그럼 말난 김에 나 혼자 가지...’
특별히 뭘 보겠다고 내려온 것이 아니니 발길을 우선 속초 중앙시장 쪽으로 돌립니다.
몇 년 새 중앙시장은 변해도 많이 변했습니다. 시장의 속성보다는 관광지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손에는 M닭강정 포장을 하나씩 들고,
어떤 호떡집 앞에는 줄이 끝 모르게 늘어서 있고, 지하상가 회센터는 마치 공장 같은 분위기입니다.
한쪽으로는 해산물만 팔고 가운데에는 공용으로 쓰는 테이블들이 놓여있어
양념집에 부탁하면 반찬 몇 가지와 매운탕을 날라다 주는 식입니다.
저같이 혼자 온 사람이 주인과 노닥거리며 저녁 먹을 선술집 하나 찾기가 쉽질 않습니다.
새로운 게 눈에 띕니다.
좌판에서 꽁치 다져 놓은 것을 파네요. 어떻게 먹느냐 물으니 완자를 해먹으면 맛있다 네요.
상할까봐 내일 아침을 기약합니다.
아바이마을 쪽으로 내려가니 갯배에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금강대교 아래에는 어선들이 들어찼습니다.
포구에는 생선을 굽느라 연기가 자욱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자연산 활어, 건어물, 숙박, 추억이 있는 곳’이라고 쓰인 문을 지나
동명항 쪽으로 들어서니 여기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고무 함지박에 해산물들을 넣고 파는 아주머니들은 조금밖에 볼 수 없고,
커다란 회센터가 생겨 여기서도 한쪽에서 해산물을 사면
회를 전문으로 다듬어 주는 곳으로 가고
그걸 소쿠리에 넣고 2층으로 올라가면 매운탕과 양념을 제공하고...
마치 제품을 만드는 일련공정의 벨트라인이 연상됩니다.
제 스타일과는 왠지 맞질 않아 나오다 보니
석쇠를 올려놓고 사람들이 둘러앉아 도루묵을 구워먹고 있는 좌판이 있는데 그게 마음에 듭니다.
아쉽게도 자리가 없네요.
2006년도 동명항은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아까 중앙시장 안에서 함흥냉면과 명태회를 세트로 주는 집을 본 것 같은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근처에 사람이 많은 횟집이 있어 ‘섞어물회’를 하나 시키니
간막이가 된 접시에 반찬 3가지를 올려놓아 그거 하나 달랑 내옵니다. 군대식 1식3찬인가?
물회가 그런대로 괜찮았어도 오늘은 영 아닙니다.
‘에이! 일찌감치 가서 잠이나 자자.’
새벽녘에 누군가가 팔을 내목에 걸칩니다.
깜짝 눈을 떠보니 곁에서 자던 젊은 친구가 잠결에 내 목으로 팔을 올린 겁니다.
물론 고의는 아니겠지요.
코골이로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구석진 자리를 잡았더니 이 친구는 저보다 코를 더 고는 겁니다.
헛손찌검 한번 해주고 샤워를 하고 해장을 하러 나섭니다.
보통, 시장은 새벽녘부터 문을 여는데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상인이 거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이래서는 어제 맘먹었던 꽁치다짐과 강원도 막장과 젓갈도 못 살 것 같습니다.
다시 아바이 마을이나 구경하고 올까요?
커다란 갯배를 혼자 타고 다리 쪽으로 건너가니 모래밭이 펼쳐집니다.
날씨가 흐려 해가 솟는 걸 구경하긴 어렵지만 아침 공기는 상쾌합니다.
아마 이곳에 실향민들이 많이 살았었는지
아직도 문 앞에 못 쓰는 그릇에 화초를 심어놓은 낡은 집들이 좀 있습니다.
시간을 보냈는데 아직도 거리에는 문을 연 음식점들이 없습니다.
중앙시장에도 상인들이 별로 보이지 않고요.
시장 안은 포기하고 근처 골목으로 들어가니 조그마한 횟집이 두어군데 눈에 들어옵니다.
'또복이네'라고 써있는 집 앞에서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에 앉아계시던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 한분이 일어섭니다.
순간 ‘아이쿠’ 소리가 났지만 마수걸이를 망치게 할 순 없지요.
“혼잔데 뭐 먹을 거 있어요?”
“그럼요, 매운탕두 있구, 회덮밥이나 무침회도 한 사람이 먹게 만들어 줄 수 있더래요.”
벽을 쳐다보니 젊었을 때 사진과 손주들 사진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젊었을 적 할머니 얼굴은 미인입니다.
그걸 보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이젠 사진이나 걸어놓고 그거나 보고 산다’면서
삼남매 다 키워놓고 단골들 상대로 살림집 반, 가게 반 장사하고 있다는 얘길 합니다.
“큰 아드님 나이가 어찌 되는데요?”
“마흔 아홉.”
“예?”
순간 속마음으로 파파 할머니 취급해드린 게 미안해집니다.
남편 잃고 혼자서 자식들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그렇게 허리가 휘신 걸까요?
할머니는 조금 있으면 예약손님이 와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커다란 숭어와 조그만 광어를 가져다 능숙한 솜씨로 손질합니다.
무침회가 나오기 전 조그만 접시에 남자들에게 좋다며 목젖 부근의 쫄깃한 부위를 갖다 줍니다.
반찬이 많진 않아도 하나하나 손수 만든 음식들이니 전날에 비할 수가 없지요.
먹다 조금 남을 것 같으니까 할머니는 싸줄 테니 해변에 나가 먹으라고 종이 소주잔까지 챙겨 주려 합니다.
“나 이제 서울로 올라갈 겁니다. 그냥 하나 더 만들어 싸 주세요”
버스 안에서 봉투가 쓰러져 바로 세우며 안을 들여다보니
무침회가 들은 비닐 하나, 상하지 말라고 얼음 간장패트병 하나, 소주잔 2개, 나무젓가락 2개가
가지런히 들어있습니다.
오래 전 명절 때 제사를 지내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이 있었더랍니다.
이집이 열여덟 번째 집인데 밥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묻더라는 거지요.
쉰다고 손님을 돌려보내니 아들이 그러면 저 손님 오늘 밥 먹지 못한다고 야단치더랍니다.
화들짝 정신이 들어 저만치 가고 있는 손님을 붙들어다 밥을 먹여주었더니
다음에 다시 찾아와 그때 갈비찜이 너무 맛있었다며 감사를 표하더랍니다.
물론 밥값은 공짜였지요.
‘아.주.머.니’의 그 말이 떠오르며 '할.아.버.지' 마음이 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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