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낮 좀비컴퓨터로 전락해버린 집컴퓨터의 시신 중 일부인 하드디스크를 떼어
마침 사양이 비슷한 병원 컴퓨터 리커버리 파일로 복구를 하고나니 시간이 어정쩡하다.
슬슬 걸어 낙원동 악기상가와 인사동을 거쳐 운니동 운현궁으로 향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흥선대원군의 체취가 묻어있는 곳.
운현궁은 고종 즉위 1년 후부터 고종이 출생한 사가(私家)를 신,증축하고 운현궁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대제학 김병학이 낙성식에 참석하고 지은 노락당기를 보면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밖에 되지 않았다 라고 해서
대원군의 위세가 어떠하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권세는 최근에 보수를 마친 근정전에서 발견 된 상량문과 함께 발견 된
흥선대원군 치적문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운현궁은 대원군의 거처였던 노안당, 노락당, 안채였던 노락당이 민비가 왕비수업을 받은 곳이라
뒤에 따로 안채를 만든 이로당이 중심건물이며 부속행랑채들과 경비를 위한 수직사가 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성정을 보면 민비의 흔적이 묻어있는 노락당에서 지낸다는 것이
별로 유쾌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 이로당을 따로 지은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
원래는 2-3만평의 넓은 공간에 창덕궁과 통하는 고종 전용의 경근문,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노안당 솟을대문에 붙은 입춘방
물론 전시를 위해 갖다놓은 이불이며 베개겠지만
색의 조화가 세련됐다.
수직사 포졸의 이부자리가 이 정도로 세련되었다니...
노안당
파락호 행세를 하며 기회를 노리던 이하응이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등극되고 운현궁을 지어
사랑채를 '늙어 마음이 편한' 노안당으로 지었으나...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기 이전부터 김정희와 교류를 하여 대원군이 남긴 붓글씨를 보면
추사가 쓴 것인지 대원군이 쓴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운현궁의 현판은 모두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다.
노안당은 겹처마로 왼쪽부터 서까래, 부연 그리고 특이하게 차양이 달려 있는데
이런 차양은 형태는 다르지만 창덕궁 연경당, 선교장 열화당에도 있다.
노락당 북행랑채 위로 보이는 건물은 덕성여대 평생교육관 사무실 건물로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이 일본사람들의 손을 빌려 지은 운현궁 양관이다.
잘 보존되고 있는 근대건축물로 다음 기회에 들러 볼 작정이다.
운현궁의 봄
이로당 서쪽 벽면
대원군의 낙관 '석파'
흥선 대원군
어렴풋이 '쇄국정책등의 실정으로 1873년 실각하였다.'라고 씌여 있다.
대원군에게는 쇄국정책과 경복궁 중건등의 실정으로 마치 조선멸망의 주범인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백지원이 <왕을 참하라>에서
'채 10년도 안되는 섭정기간 동안 무신을 우대하고 지역차별을 없앴으며, 호포제를
시행하고 삼정문란을 개선한데다 서원까지 철폐한 것은,
다른 왕들은 반세기 씩 재위하면서도 위의 몇가지 개혁 중
겨우 한가지를 제대로 할지 말지 할만큼 혁혁한 개혁이었다.'라며
'차라리 대원군이 백년쯤 일찍 태어나 이런 개혁을 펼쳤으면
조선왕조의 수명은 아마 몇백년 길어졌을 것이다.'라는 주장에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성황후와 일본을 생각하면 착잡하기 그지 없지만
그렇다고 대재앙을 맞고 있는 이웃나라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지진이나 쓰나미보다도 계속된 원전폭발로 멀쩡한 땅이 인간이 오랜기간 발디딜 수 없는 땅이 돼버리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침착과 질서를 잃지 않는 일본사람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조속히 수습되고 최소한의 피해로 마감되길 진정으로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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