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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양관은 뭐지요?

fotomani 2011. 3. 22. 09:21

 

 

운현궁을 둘러볼 때마다 느낀 의문이 2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운현궁이 왜 이리 협소할까?'이고 '저 뒤의 근대식 건축물은 무엇인가?'였는데,

운현궁 양관에 대해서는 건물 앞에 해설표지판도 없어 알아보니

문화재청에서 2002년도에 보수를 하며 실측보고서를 내놓은 책자가 있어

이런 의문이 쉽게 풀릴 수 있었습니다.

 

 문화재청 주관으로 강원대 산업기술연구소, 한인건축사사무소에서

만든 것으로 첨단장비들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만든

쉽게 보기 힘든 잘 만든 자료로써 운현궁 양관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으니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하여 사진을 설명할까 합니다.

전경 : 출처 : 상기 자료집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운현궁 정문

 

운현궁은 1910년 이후 일제의 총독부 토지조사사업(1918)년 완료됨으로

조선 왕실이나 관청, 공공기관의 궁장전, 역둔전과 같은 토지와 공유지가 모두 몰수되어 총독부 소유가 되었는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개인소유로 변해 토지분할을 하게 되고,

구 왕궁관리국으로부터 운니동 114번지, 3586평의 땅과 284.66평의 양관건물이 덕성학원에 팔리게 되었다.

 

그후 중앙문화센터, 김앤장 변호사사무소, 일본문화원이 들어서면서 운현궁의 규모가 축소되게 되었고,

현재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 등은 서울시가, 양관과 육사당은 덕성여대 소유이고, 영로당은 개인소유로 분할되었다.

 

 

초소와 정자

그것 참 묘한 대비이다.

초소는 경비가 목적이고 정자는 쉬는 게 목적인데 용도도 다르고 크기도 비교가 되는 건축물을

왜 저리 세워놓았을까?

 

 

 

지붕의 장식물로 사무라이가 연상된다.

 

 

 

운현궁 양관

발코니와 지붕구조가 '저택'임에 틀림이 없다.

 

양관은 조선총독부가 친일귀족들에게 서구식 오작서훈제를 실시하고 그 상징으로 몇채의 양관을 지어주었는데,

박제순, 윤덕영, 윤택영, 이건공 등의 공택이 그것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가타야마 도우쿠마는 1908년 용산 조선총독부 관저도 설계한 사람으로 고종으로부터 서훈도 받았는데

운현궁저택이 조선황족인 이준공을 위해 지어진 것은 확실하다.

이 건물은 준공이후 지금까지 큰 개보수 없이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대원군가와 함께 구한말의 풍운을 상징하는 건물로 근대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할 수 있다.

 

 

양관은 석재를 혼용한 2층 벽돌조 건물로 284.66평이며

전체 구성은 좌우대칭 프렌치 르네상스식 건물인데 2층 중앙부에 4개의 이오닉 오더의 붙임기둥 장식이 있다.

중앙현관과 기둥은 석재이고 기타부분은 벽돌조에 모르타르 칠하였다. 

난방은 벽난로 바닥은 목조이며 화장실과 부엌이 내부에 없고

구조로 보아 양관은 손님들을 접객하고 연회의 장소로 사용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건물 서측문으로 지금은 화장실로 통하는 문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양관과 운현궁 노락당과 사이, 바로 이 위치에  연결부가 있었으며

그 연결부위는 1996년 복원공사시 노락당일부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따라서 현재의 화장실은 나중에 따로 지어졌거나 원래의 위치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상기 자료집 도면 : 지붕구조도

 

운현궁 양관을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아름다운 지붕과 피뢰침

 

그런데 운현궁은 '궁'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 것일까요?

혹 대원군 세도가 너무 당당해서 그 위세에 곁달아 궁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것 아닐까?

궐은 업무를 보는 공간이고 궁은 살림을 하는 공간입니다.

궁이라는 호칭은 또 달리 쓰이기도 하는데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살던 집을 잠저라 하고 본궁으로 불리기도 하며,

왕자나 공주가 결혼하면 궁밖으로 나가 살림을 차리게 되는데 이때에도 궁이라 칭합니다.

남양주에 있는 궁집도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결혼하여 나가 살던 집이고

이밖에 어의궁, 용돈궁, 수진궁, 창의궁, 연희궁 등 궁들도 많으나 왜란과 한국전쟁, 막개발 등으로 없어져

5대궁 외에는 궁자 붙은 건축물이 별로 없으니 이런 의문도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운현궁 양관의 동쪽 모습

 

 

육사당

이곳에서 왕실과 왕비가 될 집안이 모여 인사를 주고 받았다는 곳인데, 6,4는 六禮와 四禮를 뜻한다.

 

육례는  납채(:남가에서 청혼의 예물을 보냄) ·문명(:여자의 출생 연월일을 물음) ·

납길(:문명 후 길조를 얻으면 이것을 여가에 알림) ·

납폐(:혼인을 정한 증명으로 예물을 여가에 보냄) ·

청기(:남가에서 결혼날짜를 정하여 여가에 지장의 유무를 물음) ·

친영(: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아내를 맞이함)을 말하며, 

옛날부터 육례를 갖춘다 하면 정식결혼을 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사례는 머리에 갓을 써서 어른이 되는 관례, 혼인하는 예법인 혼례,

상중에 행하는 상례, 제사를 지내는 제례 즉 관혼상제를 일컽는 말이다.(네이버백과)

참 사람이 구실하려면 해야될 일 많습니다...

 

 

 

정원에는 하인방을 걸쳐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돌이 있습니다.

 아마 없어진 건축물의 흔적 같은데, 다시 실측보고서에서 인용을 해보지요.

 

운현궁에 대한 견문기록으로 1894년 시쿠라이 군노스케의 조선시사에 수록된  ‘내원군을 방문하다’에서

‘...서너걸음 앞에 한 노인이 서서 정중히 우리를 맞았다. 노인은 의자를 권하면서 자신은 한단 높이 있는 평상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 노인에게 ’대원군은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내가 대원군이요.‘하고 답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소박함에 놀랬다. ...

방의 꾸밈이 웅장하고 화려함은 없었지만...앞의 정원에는 나무들이 거의 없었다. ...

그러나 노송이 울창한 남산이 부르면 곧 대답이라도 할듯이 가까이 있어...’

 

윗글을 보면, 한옥에서의 살림살이가 간결, 검소할 수밖에 없고, 자연을 인공적으로 마당에 담는 일본과 달리

별로 손대지 않고 자연을 마당으로 끌어들이는 우리 정원의 특징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경관은 무척 다르지만 저도 '운현궁 양관 기둥에 기대서서' 한번 감상을 해볼까요?

그러나 남산의 늙은 소나무가 저 높은 건물을 넘어 저에게로 다가오기에는

너무 늙고 힘들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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