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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터 타고 제주도에서 혼자놀기 - 첫쨋날

fotomani 2009. 8. 7. 17:26

비행기가 다도해 해안을 벗어나나 싶더니 벌써 한라산이 보인다.  남해안에서 제주도까지 100킬로미터도 안 되는 걸 생각하면 8천미터 상공에서 고개를 돌려 이쪽저쪽을 보면 불과 지척 간에 보일만도 하다.


공항에 내려 스쿠터 대여업체에 전화를 거니 2번출구 앞에 서있으란다. 사람 건널 때마다 일일이 횡단보도 중앙선까지 나가 보행자를 안내하는 여자 공항직원을 보며 살찔 시간도 없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한라하이킹>이라는 팻말을 앞 유리창에 단 갤로퍼가 내 앞에 선다.

 


용두암 근처 샵에는 벌써 젊은 아가씨 둘이 스쿠터에 올라앉아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스포츠에서 우승하거나 기록을 낼 때마다 대한민국 여성들이 남자들의 우성인자를 모두 빼앗아 가버린 것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지만 한번도 타보지 않던 스쿠터를 용감하게 끌고 나가는 아가씨들을 보며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나이가 들면 홀대받는 것 아닌가 하여 괜히 큰 소리로 물어보기도 하는데, 샵에서는 나에게 관심도 두는 것 같지 않아 묻지도 않는 대답을 한다. “나 스쿠터 처음 타보는데...”. 아들보다도 더 어린 직원이 내 엉덩이 하나를 편히 올리기도 힘든 줌머 안장 뒤로 걸터앉더니 액슬을 올리란다. 더운 날씨에 등판과 엉덩이에 끈적한 동성의 둔부가 닿는 불쾌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스쿠터는 경쾌한 엔진음을 내며 미끄러지듯 나간다.


“동네 두 바퀴만 돌고 나가세요.”

 

 

 

 


용두암을 거쳐 해안도로로 나오며 샵에서는 ‘쪽팔릴까봐’ 두르지 못한 버프로 목과 머리를 감싸려고 길 곁에 세운다. ‘이 조그마한 스쿠터가 왜 이리 무거운거야’ 속으로 투덜대며 마치 역기 들듯이 낑낑대며 몇 번만에 겨우 받침대를 세워놓는다. 보통 여름에 여행할 때는 트래킹용 샌들 하나로 뭉개지만 처음 해보는 스쿠터 여행인지라 준비도 기막히게 해왔다. 긴팔 기능성 셔츠, 등산용 여름바지, 트래킹화, 버프, 덮어쓰고 신는 나를 보며 반바지, 반팔의 젊은 스쿠터족이 곁을 지나며 이상하다는 듯이 힐끔 쳐다본다. ‘이따 저녁 때 봐라. 이 녀석들아.’

 


줌머라는 스쿠터는 시속 30킬로만 넘어가면 빨간 불을 반짝인다. 덕분에 안전운전은 하겠지만 곁으로 씽씽 달리는 스쿠터족이 부럽기만 하다. 공냉식은 한 시간 정도 타고 10여분 쉬어가며 엔진도 식혀 주어야 하지만 이놈은 수냉식이라 그런 압박에서 벗어 날 수 있어 좋긴 한데 사진을 찍기 위해 몇 번 스쿠터를 세우고 나니 ‘역기’를 드느라 오른팔 어깨죽지부터 손목까지 뻐근하다. 아열대성 가로수가 늘어선 얕은 언덕길을 올라서자 내려다 보이는 파란바다와 백사장. 웰빙을 추구하는 시대에 제주도는 정녕 축복받은 땅이다. 그러나 역기를 들기 싫어 시동을 끄지 않고 스쿠터에 탄 채로 경사로에서 뒤로 밀리는 스쿠터를 깡충 발로 버둥대고 버텨가며 사진을 찍을려니, 좋은 경치가 나온대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제주도는 서울에서처럼  그 흔하디흔한 도로 안내 표지판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선으로 들어서면 갈려던 곳은 지나쳐 버리고 동서남북이 헷갈리고 좁은 소로를 누비며 이곳저곳 들러 보려던 꿈은 초장부터 무너진다.  네비게이션이 필요하다는 후배의 말을 안 듣고 챙겨오지 않은 게 후회되지만 애써 발걸음 가는대로 가는 여행이 이런 것 아닌가 스스로 위로해 본다.

 

 

 

 


한림에서 해안도로를 버리고 <오설록> 녹차박물관과 추사적거지를 보려고 내륙으로 들어간다. 줌머는 안장 뒤에 배낭을 동여맬 짐칸이 없어 비록 옷가지 몇 개밖에 들지 않은 배낭이지만 매번 등에 지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오설록에서 현장에서 덖어주는 차를 한 봉지 사는데 마치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갈 때 대둔사에서 초의선사로부터 차를 얻어가는 기분이다. 느긋하게 정원의 배롱나무를 구경하며 먹는 녹차 아이스크림을 같은 값으로 장터처럼 바글거리는 홀에 선채로 허겁지겁 먹는다.

 

 

 

 

 


안내표지판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붙어 있어 추사적거지를 코앞에 두고 동네를 뺑뺑 돌다 겨우 찾아 들어가니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폐관 준비중이라 써있다. 추사가 유배되어 왔을 때는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가시 나무울타리 안으로 제한하였다 한다. 그러다 감시인의 묵인 하에 서당에도 나가고 했다는데, 차가 얼마나 마시고 싶었는지 초의선사에게 거의 강압적으로 차를 부탁하는 편지를 부친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적거지는 밖거리(사랑채), 안거리(안채), 모거리(별채)가 갖추어진 그 당시로는 괜찮은 초가집이다. 제주도에는 잡초처럼 수선화가 많다고 하는데 돌담 아래에는 수선화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꽃이 피어있다.  마당 구석에 있는 통시를 보니 먹을거리와 피부병으로 고생하며 지냈다는 ‘시건방진’ 천재의 유배생활이 짐작돨 것도 같다.

 

 


송악산 부근 길가에 상모 해녀의 집이라는 작은 식당이 있다. 탈수로 인한 갈증은 역기드는 번거로움을 잊게 해준다. 안으로 들어서니 부자지간인 듯한 여행객이 간단한 안주로 맥주를 들고 있다 괴상한 모습을 한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아점을 먹어 배는 그리 고프지 않지만 음료수를 먹기는 싫고 소라성게물회를 하나 시킨다. 얼음이 둥둥 뜬 오이냉국에 소라와 성게가 들어간 물회는 해갈에 안성맞춤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싹싹 비우고 알뜨르 비행장이 어디냐고 물으니 묻지도 않는 근처의 43유적지까지 설명해주며 자세히 위치를 가리켜주는데, 제주사람이 느끼는 43사건에 대한 시각은 남다르다는 걸 피부로 느낀다.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유년소설을 보면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43사건의 끔찍한 실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친척 중 한두사람 연루되지 않은 제주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을 생각하면 그 한의 깊이가 어떠할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산방산 부근의 너른 벌판은 비행장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요소요소에 콘크리트 격납고와 탄약고 갱도진지들이 풀로 위장되어 멀리서보면 얕은 언덕이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보는 산방산과 송악산에서 보는 산방산은 같은 산이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주차장 곁에 있는 43유적지 섯알오름학살터는 미군정에 의해 이미 파기된 일제치하 예비검속법을 악용하여 주민 210명을 집단학살하여 암매장한 곳이라 한다. 잠시 둘러보며 참자유를 향한 우리들의 발걸음은 어디까지에 와있는 것인지 생각해본다.

 

 


처음해보는 스쿠터여행이라 일정을 잡을 수 없어 찜질방을 각오하고 떠났으나 막상 찜질방으로 향하려니 저번에 봉화에서 소란스러워 혼난 생각이 나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성수기에 여관방 잡는 것은 도심 중에도 도심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첫 전화에 방을 구하고 저녁을 들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약국에서 스프레이 파스를 한 통 구입하며 혼자서도 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느냐 물으니 잠시 난색을 짓더니 <아랑조을거리>라는 곳에 있는 사방팔방이라는 횟집을 소개해준다.

 

 

 


남편은 선장이고 부인이 경영하는 횟집은, 소개를 받고 왔다하니 <알아서 회>로 한 접시 들라한다. 먹지도 못할 만큼 바가지 씌울까봐 ‘저 양 적어요’하니 듣는둥 마는둥이다. 깔리는 밑반찬에 오분자기 무침과 자리회가 있다. 한라산물 순한 소주 한 병 시켜 따라놓고 자리회를 한 점 집어 된장에 묻혀 먹으니 사각거리는 질감이 괜찮다. 이윽고 나오는 회 한 접시, 반은 어랭이회 반은 각재기회란다. 그것도 많은 것 같아 여사장님이랑 소주 한잔하며 나눠먹을라 하니 뱃사람인 남편이 떠올라 접어두고 상치에 어랭이 한 점, 각재기 한 점, 자리 한 점, 오분자기 가끔씩 마늘에 된장을 무쳐 올려놓고 안주삼아 먹으니 어느새 한 접시 다 비워지고 밥은 사절이라고 위에서 신호가 온다.


식당을 나서니 아랑조을거리라 써놓은 표지판 위로 달이 휘엉청 떠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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