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스 단파라디오. 50년대 중반 제품이라 한다. (Model T-600)
단독주택에서 살다보면 버리자니 아깝고 언제건 쓰겠거니 하며
여기저기 소중히 꽁꽁 싸서 보관해 놓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쓸려고 보면 어디에 놔두기는 놔뒀는데 어디에 두었는 지
생각날듯 하면서도 생각이 나질 않아 발바닥이 간지러워지는 때가 있다.
오래되었는데도 도금상태가 좋은 지 녹이 그다지 많이 쓸지 않았다.
꼭 찾아 써야 되겠다면 시간을 되돌려서 그 상황을 재현해볼 수밖에 없다.
'그 때 대청소를 하느라 다 뒤집어 엎었었지, 나중에 쓸려고 어디 손이 쉽게 닿는 곳에 두었을텐데...'
'아 그때 애들 방 치우며 오래 된 물건을 지하실로 내려 보냈지' 등등
그래도 생각이 안난다면 불편해도 포기하든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작은 물건이면
다시 사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눈 앞에 나타나 달라고 기도하든가...
아마 단파방송으로는 극동방송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간첩검거 사진에는 꼭 단파라디오 하나 씩은 들어 있었는데...
저 빨간 슬라이딩 스위치!
그 옛날엔 이런 슬라이딩 스위치를 왜 그렇게 많이 썼던지...
그런데 기도도 안했는데 샘물 속에서 무엇인가 나타났다.
나무를 재단하고 집성하느라 창고로 쓰는 방에서 공구를 꺼내느라 박스를 하나 씩 들어내다 보니
맨 아래 구석에 오래 된 가방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가?
꺼내보니 그것은 장인 어른께서 쓰시던 제니스 라디오였다.
껍데기에 푸른 곰팡이가 슬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건재한 모습이다.
속은 보시다시피 여자들이 보면 귀신이 나올 것 같고,
남자들이 보면 이거 골동품으로 내다팔면 얼마나 받을까 할 정도이다.
노란 새시 위에 도열된 진공관, 스피커를 고정해놓은 함석판, 바리콘...
고색창연하다.
컴퓨터 내에 있다해도 별로 촌티가 나지 않을 것 같은 현대적인 감각의 빨간 스트랩은
뒷뚜껑 매다는 줄인 줄 알았더니 안테나와 연결되는 케이블인 것 같다.
스피커 콘지도 비교적 깨끗한 상태이다.
왼쪽 위에 흐릿하게 번개불을 연상시키는 ZENITH 로고가 보인다.
군무를 추듯이 나란히 부채가 펼쳐지는듯한 바리콘과 진공관
어릴 때는 전축의 앞보다도 뒤쪽에서 들여다 보기를 좋아했는데
이 보다 더 큰 진공관의 빨간 불과 플레이트와 운모판은 잘 계획된 첨단도시의 야경 같이 빨려들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전에는 모래밭에서 고무신에 다른 한짝을 말아 집어놓고
그것을 트럭이라 여기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밥 먹어라' 할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요즘은 장난감들이 너무 정교해서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빼았아 가는 것 같다
마치 사람 얼굴을 그리라면 위에서 1/3에 눈이 위치하고
입술은 아래서 1/3...
아이들이 상상하기도 전에 어른들이 '이건 아니야. 눈은 이렇게 그려야지!'
아이들은 틀 속에 들어가 숙성된 뒤 똑같은 형태로 나오는 물건이 되어간다.
이건 전원과 연결되는 커넥터 같은데 요새 여기에 연결되는 잭을 구할 수 있을까?
그래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나게 된 이유가 있겠지.
언제 시간내서 때빼고 광이나 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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