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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 없는 절터에 뭐 볼 게 있다구?- 고달사지

fotomani 2014. 4. 24. 09:21

기존 홈페이지가 폐쇄되며 잃어버린 글을 수정. 보완하여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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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유사성이 있는 보원사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를 위해 잠시 고려 초기 법인국사와 원종대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법인국사 탄문은 광종의 후원 아래 보원사라는 거찰을 중창하고 그곳에서 입적하여,

서산 보원사에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법인국사 대승탑과 탑비를 경종 3년 (978)에 완성하였다 하고,

원종대사는 고려 태조 때 국사로 법인국사와 비슷한 시기에 입적해서,

그 분이 입적한 여주 고달사라는 곳에 원종대사의 부도와 탑비가 있으며

절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채 절터로만 남아 있는 점이 보원사와 유사하다.

 

(서산 보원사지 2006. 주변에 100여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는 대사찰이며,

이곳에 있던 신라와 고려시대의 대형 철불 2구를 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

 

(보원사지 5층석탑)

 

이와같이 비슷한 시기에 입적한 두 고승을 위해 광종이

서산 상왕산 보원사와 여주 혜목산 고달사에 국공을 파견하여

부도(탑)과 탑비 건립을 명해서 경종 때 완성을 보게 된 공통점이 있는데도,

두 군데의 탑과 비는 이상하게도 서로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이 이유를 최성호의 “관촉사 석불(은진미륵)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두 곳의 조형물은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장인의 개성에 따라 전혀 다른 조각 기법과 성향을 나타나게 되었고,

관촉사 은진미륵과 고달사 부도탑은 서로 같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원숙한 조형성과 힘의 조화가 고달사 석조물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http://hanok.org/zero/zboard.php?id=repor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4)

 

(법인국사의 탑비와 부도- 아래와 비교해보시길)

 

 

간간히 비가 뿌리는 아침, 양평에서 여주로 가며 찾는 고달사지는

마치 모래섬에 갖힌 개미가 더듬이를 두드리며 탈출로를 찾는 것처럼

온 지방도를 헤매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초입에 자리한 고달사 터는 켜켜이 쌓여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으려는 발굴조사로

곳곳에 배수로와 파란 천막지로 덮혀 있었다.

절터는 얕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넓은 개활지로 짜임새 있고

자욱한 안개구름은 신비로운 느낌을 더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석불대좌.

멀리서 밋밋하게 보였던 석불대좌는 가까이 다가 갈수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연꽃무늬가 나타나

별 거 아니겠거니 속단했던 나의 경망스러움을 부끄럽게 만든다.

거의 눈높이까지 오는 연꽃잎(仰蓮)으로 장식된 상대석은

이 위에 올려졌던 불상이 얼마나 컸었나 하는 궁금증보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좌 위에 올린 불상은 과연 얼마나 잘 생겼을까하는 궁금증이 더 앞서게 만든다.

 

 

 

 

이 뒤로는 오래 된 향나무와 원종대사 부도비가 안개비 사이로 묵직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1915년에 무너져 탑신은 경복궁 근정전 서쪽 회랑에 있다고 하며,

2010.12월 보도에 의하면 보존처리하거나 복제해 여주박물관에 전시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 하고,

여기에는 거북받침돌인 귀부와 이무기 머릿돌인 이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에 젖은 거북은 갑옷을 걸친 장수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근육질의 발을 떡하니 벌리고 서서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 같고,

머릿돌의 용은 승천을 하려는 듯 춤을 추며 이제라도 입을 짝 벌리고 포효할 듯 하다.

도도하고 당당한 앞 모습과는 달리 동그랗게 말아 올린 꼬리는 잔잔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역동적인 석조물을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솔잎 냄새가 피어오르는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둔덕에 원종대사혜진탑이 보인다.

다가서면서 속살을 내보이는 부도탑.

중대석에 새겨진 거북과 용은 앞을 보고 있질 않고 서로 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듯 만들어

마치 살아있는 것을 보고 조각한 듯 보인다. 그것 참!

탑신의 사천왕과 문비(자물쇠)는 그렇다 하더라도

옥개석 밑에 새겨 넣은 미려한 구름문양은 비단결 같은 구름을 연상케 한다.

 

 

 

 

 

 

 

 

왼쪽으로 나있는 숲속 계단은 국보 서열 4번째인가 하는 고달사 부도탑으로 가는 길이다.

보물이라는 원종대사부도탑만 봐도 아름다움에 잔잔한 감흥이 아직 식지 않는데 

얼마나 잘 만들었길래 네 번째 '국보'라는 또 하나의 예술품이 저 위에 '.또.' 있는것일까….

 

'비교적 최근인 2002년 경기 여주군 북대면 고달사지(高達寺址) 부도(浮屠.국보 4호)가

도굴꾼들에 의해 상륜부(相輪部) 일부가 훼손된 일이 있었다.

탑 안에 있을 지도 모를 보물을 훔쳐내기 위한 소행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실로 유감스럽게도 고달사지 부도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몽땅 도굴됐다.

이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한 때 나돌았다.

"요즘 도굴꾼들은 공부도 안하나 봐!" '이광표의 '국보 이야기'(작은박물관 펴냄)

 

 

 

너무 맛난 것만 먹으면 감각이 무뎌지는 것일까?

아래에서 잘 생긴 석조물들을 보고 올라와서 인지 감동은 덜 하다.

원종대사 부도탑과 여기 고달사 부도탑은 형태가 거의 같으나,

탑을 올려놓은 지대석이 전자는 사각이고 이것은 팔각이며, 중대석의 거북과 용에 힘이 들어가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거북은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권위를 강요하는 모습이다.

옥계석의 귀꽃은 좀 더 정교하고 꼿꼿하게 서있어 전체적으로 보다 엄숙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이것이 원종대사 부도탑보다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왜 고달사 부도탑이 국보이고 원종대사 부도탑이 보물로 지정되었는지 이해될 듯도 하다.

 

 

 

 석공은 가고 비록 육신이 흙이 되어 버렸을 지라도 그의 예술혼은 천년만년 살아 있는 것일까?

아직도 석공의 돌 다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런데 광종이 법인국사보다 원종대사를 총애한 느낌이 왜 들지?

 

*'사(寺)도 아니고 사지(寺地)에 가서 뭐나 있겠어?'라는 경망스러움은 금방 없어진다.

물론 비가 흩뿌렸던 날 갔기에 더욱 감상의 조건이 무르익었겠지만...*

 

06/07/05

 

닥다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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