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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종택에서 이 시대의 어른을 생각하다.

fotomani 2014. 5. 20. 09:24

기존 홈페이지가 폐쇄되며 잃어버린 글을 수정. 보완하여 다시 올립니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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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 좋아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으면서도

 '과연 이런 곳에선 어떤 사람이 살았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으니

도산서원을 보아도 양동마을을 들르고 녹우당을 둘러보았어도 

그저 겉에 보이는 하드웨어에 유치한 감탄사 한마디 내지른 꼴밖에 되지 않는다.


 

(학봉종택.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고택정도로만 치부했는데 파고들수록 진국이다.)


 


대구로 가는 길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는 봉정사 극락전을 들르겠다고 

차머리를 안동으로 향할 때만해도 그저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안동 서후면으로 들어서면서 길 양쪽으로 보이는 학봉종택, 간재종택, 안동 권씨 재실... 

'- 이거 뭐야?', 

해방 후에 남쪽으로 내려온 가족의 일원인 나에게 

조상이란 그저 명절 때 차례상을 차려놓고 절할 때나 잠시 떠올려보는 정도이고

내 초등학교 친구처럼 사돈의 팔촌까지 두루 꿰는 가계는 

그저 그런 집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 그 무게를 잘 알 수 없었다.


 

(사랑채 풍뢰헌. 보통은 홀수로 칸이 이루어지는데 독특하게 4칸집이다.)

 

마치 안강(경주시 안강읍) 양동마을을 연상시키는 

지방도 좌우에 자리 잡은 잘 손질된 종택들은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먼 발치에서도 무언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기운이 느껴진다.

봉정사 대웅전과 극락전을 둘러보는 중에도 마음은 내려가다 드를 학봉종택과 간재종택에 가있다.


 

(전면이 사당, 우측이 유물전시관 운장각)


 


학봉(鶴峯)종택은 퇴계의 제자인 의성 김씨 김성일이 살았던 곳이라 했다

그러나 안내문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 간 그 분의 생애와 문중은 

파면 팔수록 실한 고구마가 흙 속에서 엮여 나오는 듯해서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학통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도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고 장열이 전사한 기록만 해도 대단한데

일제하에서도 항일운동으로 후손들에게 맥이 이어졌다하니

나약한 지식인이 현대인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오늘 날, 그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광주 무등산 제봉 고경명의 아들 셋 중 둘을 임진왜란중에 고경명과 함께 전장에서 잃자 

셋째 아들을 학봉집안으로 데려와 대를 이었다 하며

나주목사로 재직 시 불모지였던 나주에 서원을 세워 영호남간의 학문교류에도 힘썼으니 

선거 때만 되면 지역감정 건드리고 네편 내편 가르는 사이비 지도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우리 사회의 진정한 어른이 아니었을까?


 

('도집레 류녕하'라고 쓰여져 있는데 김씨문중에서 류성룡 집안 종손이 집례하는 것이 특이하다.)

 

이렇게 학문에 출중하고 그에 걸맞게 의리가 강하며 국가에 충성하니 나라에서도 무슨 보답을 하여야 되겠는데

이것이 '불천위(不遷位)'로 보통은 제사를 4대까지 모시지만 

이렇게 특별한 경우는 4대가 지나도 신위를 사당에 영구히 모셔 제사를 지내도록 특별히 지정하는 것이다

불천위는 주로 안동을 중심으로 많은데 위에 이름을 들은 고경명, 류성룡, 김성일 모두 불천위이니 

풍수지리는 모르지만 이곳이 바로 명당이거나 대인은 대인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 서로 모여 살게 되었을까?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는 한지 두루마리를 볼 수 있는데

'도집례 류녕하'이하 이름이 줄줄히 적혀 있고 '무자년 3월 초3'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종손 김시인의 49재는 아닌 것 같은데 관례(전통사회 성인의식) 같은 경우는 

류성룡의 종손 류녕하씨를 초대하여 관자(冠者)를 인도하였다 하니 

의성 김씨 종택에 풍산 류씨 종손 이름이 걸려 있다 해도 위와 같은 이유로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안채로 들어 가는 문. 수많은 손님들을 치루느라 휘어버린 것 같은 문지방이 인상적이다.)

 

안채는 ''자 형태로 달처럼 휘어진 문지방을 건너 들어가면 대청마루와 방 둘이 나란히 보인다

대청을 가로지르는 도리(천장 구조물)에는 제비가 진흙으로 집을 지었는데 

그 아래에 작은 판자를 대어 오물이 떨어지지 않게 한 배려가 눈에 띈다

지난 2월 타계한 이 집안 14대 종손 김시인은 29살의 나이에 양자 왔는데 

선대 김용환은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유명하여 집안에 남아 있는 것이 변변히 없었다 한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일제의 눈을 피해 파락호로 위장하여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하는데

심지어 시댁에서 보내온 딸의 장롱값까지 군자금으로 보내서 

그러한 내력을 알게 된 딸 김후웅이 쓴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눈물 젖은 서간문이 우리를 뭉클하게 만든다.


 


몰락한 집안에 종손으로 들어 온 김시인은 집안을 일으켰다

이때 '국량이 크고 성품이 두터울 뿐 아니라 지혜가 뛰어난 성품'의 종부 조필남의 역할이 막중했다 한다

실제로 학봉종가에서 종부의 권위는 대단하여

 정월 초하룻날 설 차례를 지낸 후 이루어지는 신년세배에서는 

안채 대청에서 후손 중 연장자 100여명이 어린 종부에게 맞세배하는 격식을 갖춘다 한다

문중 대소사를 결정할 때도 문회(門會)에서 이야기가 맺어지지 못할 때에는 

바깥에서 이 소식을 들은 종부(종부라기보다는 증조할머니)가 몇 마디 의견을 전하면 

그대로 결정되는 수가 많았다 한다.

이런 됨됨이는 조필남 할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대구 꽃집의 꽃이 동나 버릴 정도였다 하니 

그 분의 손길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안채 부엌.)

 

이런 종가의 가풍은 현 종손인 김종길(전 삼보컴퓨터 사장)까지도 맥을 이어오고 있어 

집안 행사에 아직도 1000여 명씩 모인다고 하며

종택을 의례 고택으로 치부하며 유적 감상하듯 하는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전통문화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길이 보존하여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것이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 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조용헌(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경북 안동 학봉 김성일종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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