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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익산이지? 2 - 왕궁리 유적지

fotomani 2016. 10. 20. 10:06




그렇게 점심을 들고 왕궁리 유적지로 갑니다.

마을 이름이 언제부터 왕궁면이나 왕궁리였는 지 모르지만 마한의 왕궁터여서 그렇다하나

왕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14년부터인 걸로 나와 있습니다.

온정(溫井)리에 시추를 하면 온천이 나오듯 전래된 설화에 의한 것일까요?

이참에 금(金)자 붙은 마을에 내려가 땅이나 파봐?



2015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익산 왕궁리 유적지,

미륵사지, 송산리고분(무령왕릉), 부여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 고분군 등 8개의 유적이 포함되었습니다.



궁궐담 복원하는 중입니다.


왕궁리 유적은 1989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백제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사용 후 왕궁의 중요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으로 

확인 되었답니다. 왕궁은 언제 세워졌을까요? 무왕 때?


미륵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무왕 재위기간이 600-641년인데 기계공구도 쓰지 않고 오로지 

수작업으로 그 기간에 왕궁을 건립하고 헐어내고 사찰을 세운다? 더구나 무왕은 630년 

사비성을 중수하고 신라 접경지대에 각산성(605), 적암성(611), 마천성(632)에 새로 

쌓거나 보수했습니다.

거기에다 재위기간 동안 신라와 무수한 전투를 벌였는데 왕궁까지 무왕시기에 건립했다니?

그점이 이해가 안가 제 생각으로는 왕궁은 위덕왕 때 완공은 아니더라도 

이미 어느 정도 지어졌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담터를 지나다 배수로를 보며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보니 원시 형태의 수세식 대형 화장실이 무려 3개조나 연결돼 있었습니다.



왕궁이 없어지고 사찰로 변한 후에도 궁궐 담터에는 회랑을 짓지 않고 계속 담으로 써왔던 

모양입니다. 주춧돌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고대국가의 궁터에 배수로를 이렇게 잘 정비해놓다니...



궁궐 담터를 따라 입구까지 오니 관람 안내도가 나옵니다.

유적지는 외각담장터와 14개의 건물터,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공방 등이 있는 백제 

왕궁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 둔덕은 커다란 건축물의 기단입니다. 그 뒤로 오층석탑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왕궁이 절로 변하게 된 걸까요? 

제 생각엔 무왕이 죽고 의자왕 때에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혼자 추측해봅니다.


의자왕은 무왕 재위 33년인 632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미 그때 나이 40세였습니다. 

이렇게 늦게 태자에 책봉된 것은 의자왕이 정비인 사택왕후의 출생이 아니고 

다른 왕후로부터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의자왕이 해동증자로 불리게 될

정도로 몸가짐을 조심한 것은 실권을 쥐고 있는 세력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한 

그의 처세술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군사용어로는 기만전술이라고 하지요. ㅋ

후에 대원군도 이러한 기만책을 씁니다.



목조로 되어 있는 것은 당연히 모두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으니 갑갑하긴 하지만 초석이나

 출토되는 유물로 그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알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요? 



금당 초석입니다.


여하튼 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왕권강화에 나서 여러 주와 군을 돌아보며 민심수습에

나서는 한편 신라정벌에 나서 642년 8월 신라 40성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대야성(합천)까지 취하게 되었으니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할 것 입니다.


643년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백제는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요충지 당항성(현재 화성시 

남양)을 공격합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의자왕은 할 수 없이

당항성을 포기하였지만, 이때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군에 의해 국토가 쪼그라 들고 

거의 멸망 직전이었다 합니다. 이후 근 10년 가까이 백제는 신라와 쉴 새 없이 교전을 

벌입니다. 사실 이때의 백제는 무왕의 뒤를 이어 최고 전성기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지요.



위 금당과 탑 사이에는 탑 바로 곁에 주초가 놓여 있으니 당연히 왕궁 부속건물 터겠지요.

탑 바로 곁에 사찰 건물을 지을 리가 없지요.


655년 1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납니다. 사택왕후, 대비가 승하하게 된 겁니다.

이에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복동생 <새상>의 귀국을 막고, 조카 교기와 그 형제 

자매의 딸 4명과 내좌평 기미 등 40여명을 섬으로 유배 보냅니다. 사택왕후의 세력들을 

축출한 것이지요. 해동증자라 불리우던 것과는 거리가 먼 행동 아닌가요?

말하자면 그동안 무왕의 든든한 지지세력이고 후원자였던 외척을 물리친 것인데

저는 이런 연유로 의자왕이 사택족벌의 연고지인 왕궁리 궁터를 정리하고 선무책으로

왕궁을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활용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역사가 소설이 아니긴 한 데 비전문가로써 이 정도 추측은 우리 역사에 대한 흥미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여기시고 틀리더라도 가르쳐 주시고 어여삐 봐주십시요.^^



후원 터에서 본 오층석탑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진 것은 좋았으나, 김유신과 내통하는 좌평(임자)

까지 생기고, 간언하다 옥사하는 좌평(성충), 귀양을 보내는(흥수) 좌평들까지 생기니

이는 기존 집권세력과 반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 볼 수 있지요.



아직 발굴 중잉 후원 터입니다.


6명으로 한정된 좌평직을 41명의 서자에게 내릴 정도이고 , 측근들이 전횡을 일삼아도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하고 자만심에 빠졌으니 당연히 사치와 향락에 

물들게 됐다는 것은 사실일 겁니다. 



외교적으로는 당을 멀리하고 고구려를 가까이 함으로써 신라와 당이 동맹을 맺게

만드는 실수를 저질렀고, 내부적으로는 大姓八族들과 정적관계가 되고 왕은 

향락에 빠지니 이래서야 국가가 위기일 때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그러나 패망의 원인이 의자왕에 있다해도 의자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조차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다'라는 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비록 말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든 것이 사실일지라도 삼천궁녀, 황음 등 주색에 빠진

퇴폐적인 왕으로 묘사되어서도 안 될 겁니다. 조선 시대 문인들의 근거없는 싯귀

나부랭이가 발단이 되어 대중가요에까지 심지어 교과서나 부소산성 시비에까지

낙화암 삼천궁녀가 새겨지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서야 되겠습니까?



왕궁리 유적지 모형입니다.

배병선 국립문화재 연구소장에 의하면 왕궁리 유적은 무왕이전에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다라 

하는데, 그 근거로 위덕왕 때 북제와 교류했던 기록들이 나오고, 북제시대의 도자기가 발견되고, 

왕궁리 유적지에서 미륵사와 제석사 이전의 기와들이 나오는 것으로 무왕 이전에 왕궁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궁금했던 매듭이 풀리는 듯하여 제가 다 후련합니다.



백제에서는 처음 왕궁의 담장과 내부 구조가 확인 되었습니다. 왕궁 남측 절반은  

의례와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공간이 동서방향 4개의 석축으로 공간을 나누어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북측 절반은 왕궁 내 휴식을 위한 공간인 후원과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터와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최고의 화장실 유적이 

있습니다.



대략 4가지 대표적 형태의 와적기단 모형입니다.



화장실과 단지에 꽂혀있는 뒷처리 기구

정화조는 단단한 점토가 20 cm 두께로 덧대어져 오물이 지하수로 침투되는 걸 방지하고,

배수로를 만들어 빗물과 국물이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마 이동형 변기가 아닐까 합니다마는...



그만한 화장실이 필요하였으면 공방의 규모나 궁내 거주하는 인원이 상당했을 겁니다.



아직까지 로(爐)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작은 도가니는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리 구슬이나 특히 금은 세공품은 아주 작은 구슬에 복잡한 문양을 새겨넣은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입니다.



이 토관과 화장실의 원시 수세식 처리시설들이 그 옛날 편의시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더구나 이곳에서 출토된 수부(首府)라 찍힌 기와는 이곳이 도읍지로 

사용됐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또한 오른 쪽은 위덕왕이 북제와 교류했던 시기의 북제 

도자기 파편입니다. 그러니 위덕왕과 왕궁의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지요.



후원의 중심부 작은 연못. 북쪽으로부터 물이 흘러 들어와 아렛쪽 장대석으로 구획지어 진 

곳으로 물이 흘러내려가게 하고 연못바닥에 강 자갈돌과 판석으로 꾸몄습니다. 



오층석탑 옥개석에서는 사리器와 금강경판이 초석의 品자 사리공에서는 청동여래입상과

청동요령이 발견되었습니다. 근처 제석사 목탑 심초석에서 뚫린 텅빈 사리공만 

발견되었지만, 관세음응험기에 의하면 이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오층석탑은 처음엔 목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석탑의 건립시기는 백제부터 고려 초기까지 아직 불확실합니다.



휴게소에서 주전부리 하기 싫어 익산터미널에서 이른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듭니다.  

주인 아줌마에게 '일요일인데 이 동넨 문 닫은 식당들이 왜 이리 많냐' 물으니 

'이 동넨 교회가 많다'는 시큰둥한 대답이 나옵니다. 



파김치와 함께 나온 쪽파무침. 오늘은 계속 쪽파로 달립니다.



그러더니 주방을 향해 외칩니다. "야~(주방 아줌마가 친군 모양입니다.), 김치들 남기는데

찌개에 웬 김치를 그렇게 많이 너었니~?" 내가 뭘 잘못했나? 

이른 저녁으로 먹는 김치찌개, 건더기 다 건져먹느라 애꿎은 쏘주만 한 병 날라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