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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개, 이딴게 성이야? - 백제마무리

fotomani 2016. 11. 1. 09:23




공주, 부여, 익산를 거쳐 이제 풍납동토성,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을 돌아보고

백제에 대한 두루뭉수리 여행을 마치려 합니다. 

제가 가려는 곳에 <한성백제왕도길>란 이름이 붙어 있네요.

삼국사기에는 위례성을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끼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으로는 비옥한 땅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는 곳이라고 애매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위례성이 어디인지 헷갈리게 마련이지요.



풍납동 토성에서는 풍납백제문화공원으로 불리는 미래마을 부지, 경당역사공원,

토성, 우물을 둘러 보겠습니다.



전철역에서 나오면 풍납전통시장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다음에도 말씀드리겠지만 풍납동은 토성 관련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개발제한 등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토성지구는 사람들이 데모하듯 몰려다니는

천호동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외따로 떨어진 시골 마을 같은 분위기입니다.



길가 산책로에 핀 족두리꽃



토성 주변 느낌은 수원 화성과 흡사합니다.



풍납시장 끝날 즈음 좌회전하면 소파지역자활센터가 나오는데 안내지도엔 <솔바람복지센터>

로 표기돼있습니다. 오른 쪽으로 가면 <풍납백제문화공원> 왼쪽은 <경당역사공원>입니다.



풍납지구 항공사진입니다. 풍납백제문화공원인 미래마을지구는 가운데 하얀 운동장이 

보이는 풍납초교 뒤 아파트 사이 부지입니다. 보상에만 2조가 들었다 하는데,

아파트단지는 이미 4 m 이상 파내 사용하고 있으니 발굴해봐야 의미가 없겠고, 

남아있는 단독이나 연립주택지만 발굴한다해도 천문학적인 보상비가 필요하겠으니 

주민이나 서울시나 쉽지 않은 문제로 답답하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풍납백제문화공원 조감도입니다. 



2015년 <서울 풍납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풍납토성이 왕성이냐 

아니냐에 대한 격렬한 토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왕성이냐 아니냐는 논점을 비껴난 느낌입니다. 

아니 요새 말로 어느 쪽이든 반대 측에서 쳐놓은 프레임에 갇혀버린 거 같습니다.


풍납토성의 폭은 30-40 m, 높이 6-11 m, 유실된 것포함해서  약 3.5 km이니, 

3600/4=900, 900x900=810000, 810000/3.3=대략 245000 평입니다.

원래 높이는 5층 정도의 높이였다는데 밑에 흙으로 퇴적된 곳이 많답니다.

이 정도 성벽을 쌓으려면 최소  8톤 트럭으로 20만대 분량의 흙이 필요하다 합니다.

주변 가까운데 산도 없고 교통로나 운송수단도 변변치 못한 고대국가에서 이 정도의 

대역사를 일으키려면 강력한 왕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니, 최소한 도성은 

될 것이고, 위 항공사진에서도 보듯이 발굴된 면적이 10%도 되지 않으니 왕궁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해서 왕성이 아니라 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이곳에서 기단이 없는 건물지 2곳, 기단이 있는 건물지 한 곳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엔 지층 깊이에 따라 수혈식 거주지와 지상식 건물지가 혼재되어 나타난 것이지요.



이런 초석이 있는 지상 건물지 주변에 다량의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공공성

있는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건물지는 21.6 m X 11.2 m 의 크기이며 초석 아래에는 직경 1.4 m - 1.9 m 정도의 

하부 적심 구조가 나타납니다.



표면을 매끄럽게 연마한 검은 색 토기는 백제 상류층이 사용했던 토기이며, 

중국제 청자완, 은제 장식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토성의 단면을 표현한 구조물에 각종 설명문이나 출토품 사진 등을 프린트해놓았습니다.

둥그런 막새도 이곳에서나 볼 수 있는 문양의 막새가 다량 출토되고

크고 고급스런 건축물 바닥재로 쓰이는 전돌 또한 출토되었습니다. 



경당지구,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보게 된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좌측에는 앞에서부터 창고터, 구덩이 밀집지역, 지상건물터가 있는데 구덩이에서 

말머리뼈만 9개가 출토되었습니다. 

일본 오사카 시조나와데시 박물관에 보관된 백제계 유물 중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말머리뼈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백제 한성이 

함락된 475년경 유물들이 많이 발견돼 백제 유민들이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말머리뼈는 이들이 기우제 같은 특별한 제사 의식에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물터. 각 변 11 m의 정사각형을 3 m 깊이로 파고 점토와 모래가 섞인 흙을 10 cm 

간격으로 번갈아 쌓은 후 다시 가운데를 파내 우물을 만든 후, 우물바닥을 나무로 깔고 

또 그위에 자갈을 깔고 주위에 4단으로 나무를 쌓아 우물을 만들었답니다. 




발굴 당시 우물바닥에는 200점이 넘는 토기를 5층으로 겹겹히 쌓고

돌과 흙으로 채워져 있었답니다.




대부분의 토기 입부분이 깨져 있어 이 토기들을 매몰할 당시 제사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유적지들 대부분 이렇게 공원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呂자 형태의 건물터이며 작은 공간은 입구로 후대에 훼손되어 

5.2 m X 6.2 m까지만 확인 되었고, 큰 공간은 주변 주택의 안전문제로 18 m X 13 m

까지만 조사되었습니다. 

큰 공간은 주위를 따라 폭 1.5 m의 도랑을 만들고 전돌을 깐 뒤 숯으로 가득 채워져

이곳이 매우 신성시 되는 공간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대부(大夫), 정(井)이라 새겨진 토기가 발견 되었는데 이 글자는 고구려, 

신라, 가야 심지어 왜에서도 발견된다 합니다. 이것은 글자라기보다 종교적인 의미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기호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도 규모의 집터와 종교적인 건물이라면 국가적인 규모의 제사를 지낸 

제사터가 아닌가 합니다.



현재는 2.1 km만 남아 있지만 원래의 성벽은 3.5 k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국가에서 성내 면적 25만평이 작은가요? 백제시기에 

이 정도 규모의 성을 쉽게 볼 수 있어 이보다도 더 큰 성이라야 왕성이라 할 수 있는가요?



 "...그해 서울대학교의 김원룡 교수가 전면적인 발굴은 아니지만 최초로 풍납토성 안의 

유물 포함층 8군데를 시굴조사하였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몇 가지 중요한 제안을 내놓았다

첫째, 풍납토성의 축조와 성격을 초축(初築)1세기경으로 보고 475년 공주 천도까지 

전후 약 5세기의 유적으로 추정했다

둘째, 이 성은 단순한 방위를 위한 군용 건축물이 아니라 다수 주민의 거주지였으며 

평시에는 많은 일반민이 살고 있었던 반민반군적 읍성이라고 보았다

셋째, 이 성에 살았던 백제인들이 적어도 서기 200년쯤에는 기와집에 거주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1964) "

그런데 여기에서 도성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풍납토성은 성벽만 사적 11호로

지정되고 나머지 성안팎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대규모 인구밀집지역으로 변하고 말았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초판 2004., 5쇄 2009., 돌베개)


그때 가능성을 열어 두었으면...  아~~ 아쉽습니다.



192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중국제 청동자루솥을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하남 위례성으로 알려졌고 성안 깊이 4 m에서 백제 왕궁의 일부로 보이는 각종 건물지와

우물, 창고, 도로 등이 발견되고 각종 그릇, 기와, 벽돌, 토관, 장신구 등 귀중한 유물

수 십 만점이 출토되었습니다.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토성은 몇 차례에 걸쳐 공사를 했으며 커다란 상자에 흙을 넣어 다져

쌓는 판축식 축조술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출토된 토관으로 성내에 하수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지며, 이런 시설을 만들려면 

많은 인력과 기술자를 동원해야했을 겁니다. 이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백제왕과 주변의 극소수 지배층이었을 겁니다. 

토관은 4-5세기 무렵 백제왕도의 질서정연한 도시구획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이것은 강에 면한 곳인데 유실된 성벽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홍수 후 쌓은 제방 같습니다.



지금도 지표면 수 미터 아래에서 해자가 발견되고 있으니 처음 축성했을 때 높이는 훨씬

더 높았으리라 추정됩니다.


또한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이 토성이

과연 방책의 역할을 했을까 '애개~'하는 분들도 계실텐데, 만일 해자를 깊이 파고,

 외벽 경사도를 높여서 목책을 두른 후 화살을 쏘아댄다면 어떨지 두 번째 위 

토성 축성 모형을 보고 한번 상상해보시지요. 오른 쪽 경사 급한 쪽이 외벽입니다.

게다가 갑옷이나 말은 귀중품이니 장수나 기마부대 차지일 것이고 보병에게는 

창 하나 들리우고 나이키는 커녕 장거리 행군을 한다면 나막신 아니었을까요? 

'애개'하는 분들께 '깨갱' 반박하기 위한 제가 그려 본 상상입니다. 


그래도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 주력부대는 기병이었다는데도 

북성(풍납토성)을 함락시키는데 7일이 걸렸다는 걸 보면 방어 측면에서 토성이

차지하는 역할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논밭이었으면 별 일 없었을 것을 이미 집이 들어차고, 발굴을 해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니 논란이 커지게 마련, 발굴 반대측에서는 심지어 "풍납토성은 움집터"

라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아래 김낙중님의 <3-5세기 일본 왕궁과 풍납토성>

이라는 논문 일부를 발췌해서 풍납동 토성 편을 마치려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의 고대 도성은 飛鳥·藤原京 이후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성이 

건설되고 운영된 것은 6세기 말 이후로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율령국가가 형성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3~5세기의 풍납토성을 이러한 6세기 말 이후의 宮都와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풍납토성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유적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풍납토성과 이에 병행하는 시기에 축조되었을 고대 일본의 왕궁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으로는 일반취락과의 隔絶性, 왕의 거주와 정치행위 등에 필요한 다양하고 거대한 시설

(왕의 거처제사장소 혹은 시설, 정치시설, 창고군, 공방)의 마련,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의 

존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차이점은 우선 격절 혹은 구분의 시설과 건축 기법의 수준에서 보인다. 일반취락과의 구분이 

백제는 거대한 판축성벽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왕만이 아니라 

공공시설과 귀족 등의 택지 등이 마련되어 일부 도시의 기능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성벽은 중국 도성을 모방한 등원경 이후에도 축조되지 않았다.

건축과 관련된 초석과 기와도 등원경 이후에나 등장한다. 또한 왕족뿐만 아니라 관료 등 

다수의 도시주민과 도로에 의해 구획된 조방도 마찬가지로 등원경 이후에나 보인다..."  


(후지와라쿄(藤原京 )는 아스카쿄(飛鳥京)의 서북쪽, 야마토 국(大和國)에 위치해 있었던 

고대 일본의 수도)


세간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풍납토성과 유적지이지만 막상 가보면

수혈지나 기단의 모습이 발굴 당시 찍은 모습을 프린트한 타일로 덮혀있거나

흙으로 덮어놓아 간접적인 자료밖에 볼 수 없어 흥미가 반감됩니다.

유적지 파손과 보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방법이긴 하겠지만, 모처럼 찾은 답사객의 

흥미와 상상을 촉발시킬 어떤 다른 방법을 모색하면 어떨까요?



몽촌토성은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구릉이 끊기거나 낮은 곳에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쌓은 

산성이자 토성으로, 외벽의 경사도를 높이고 목책을 두르고 주위에 해자를 설치했다

합니다.

88마당이나 만남의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혹하지 마시고 초연하게 

몽촌역사관과 한성백제박물관도 꼭 들려보십시오.



석촌동, 이름처럼 옛부터 돌마을로 불리던 곳으로 일제 초기에는 흙무덤 23기, 돌무덤 66기가

있었다 합니다. 그간 개발과 교육효과가 낮다는 이유로 지금은 8기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3호분으로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형식의 기단식 돌무지 무덤입니다.

제일 아랫기단은 대략 50 m X 50 m X 0.9 m 의 정방형으로 전체 4.5 m높이의 의 3기단 

무덤입니다. 위로 1-2 단 더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층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개로왕 21년조에 욱리하(郁里河: 한강)에서 큰 돌을 주워 곽을

 만들고 아버지의 뼈를 묻었다고 하여 한성백제시대 왕릉 축조 방식이 돌무지무덤임을 

알려주고 있고, 출토된 유물들이 4세기 것이라 하여 일부에서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지만  아직 단정지을 순 없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왕릉급 무덤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돌무지 위에 봉분이 있는 4호 2호분인데 형태는 비슷하나 4호분은 기존의 흙 봉분을

상자처럼 육면체로 깍아내고 주변에 석축을 쌓은 것이고 2호분은 석축을 쌓고 가운데 

흙을 채운 것이라 합니다. 

이걸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라 하는데 토착 유력세력의 기존 흙무덤을 고구려식 무덤으로 

형태를 바꾼 것이거나 아예 그런 형태로 만든 것이라 합니다. 



흙으로 덮은 봉토분인데 고구려식 영향을 받아 흙으로 봉토하다 중간에 돌로 지붕 덮듯 

한층 덮고 그위에 흙으로 마감한 즙석봉토분이라 합니다. 주변에 이런 왕릉급 혹은 

지배계급으로 추정되는 고분을 거느린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 멀리 아무 말없이 이 모든 것들을 압도하듯 서있는 롯데타워의 의미는 또 무엇일까요?


그동안 얄팍한 지식으로 허겁지겁 모자이크한 글을 지루하게 봐주신 여러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공주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에서 출발한 저의 단순한 호기심이 답사를 거듭하며

쉽게 떨치지 못할 매력에 끌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백제의 문화와 역사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국 중 가장 짧은 존립기간을 기록하였지만 백제의 아이콘은 삼천궁녀와 낙화암이 아니라

찬란한 문화와 당당한 기상을 가진 나라였음을 확인한 게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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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다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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