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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분수를 알아야지! - 러시안 대포집에서

fotomani 2010. 6. 10. 15:18

 

 

을지로 6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전철 4호선과 5호선이 만나는 뒷골목에는 러시아 음식점 아니 우즈베키스탄 음식점이 몇 개 있다. 쌀국수라는 월남음식이 우리나라 대중에게 소개된 것은 아마 혜화동 로터리에 자리 잡은 허름하고 작은 음식점이었었던 것 같은데 지금처럼 쌀국수를 <포-Pho>라고 부르지 않고 그야말로 그들의 ‘밥’에 해당하는 가치만큼의 월남 대중음식을 팔았던 곳이다.

 

기본으로 나오는 양파절임, 당근 샐러드, 오이피클과 따로 시킨 토마토 샐러드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드레싱과 약간 차이가 난다


이렇게 값싸고 편하게 먹어야 할 음식이 제 분수도 모르고 신분상승한 것으로써 곱창을 들 수 있는데 서초동 근방의 곱창 가격은 비싸기로 유명하고 실비집 곱창도 뒤질세라 덩달아 가격이 올라 버리고 말았으니 그저 곧이곧대로 높은 사람 하라는 대로 곁눈질 안하고 살아온 서민들은 정들었던 옛 맛을 한번 보려면 쇠고기 값을 내고도 불판 위에서 얄밉게 제 몸뚱이 크기를 줄여가는 곱창을 보며 달아나버린 심순애를 그리는 듯한 야속함을 달래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사마리칸트의 주방장겸 사장인 <알리>

종사하는 사람 중에 제일 한국말 잘하고 부지런하고 싹싹하다. 잠시 쉴 때는 골목길 벤치에 동네아저씨처럼 앉아 있는다.


웰빙이다 뭐다해서 좋은 음식의 기준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고기가 들어 간 음식은 대충 값이 비싸다. 같은 음식이라도 <특>자가 들어가면 값이 더하기 마련인데 보통과 비교를 해보면 고기라도 한 덩어리 더 들어간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즈베키스탄 음식은 양고기가 풍부하게 들어가고도 가격대비 맛이 괜찮은 편이니 제 분수를 아는 기특한 음식이라 할 것이다.

 

비닐 덮힌 메뉴판에 발색이 제대로 안된 칙칙한 사진

그림을 보고 아무리 연구해봐도 음식맛이 연상이 안된다.


많이 접해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음식점들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끈적끈적할 것 같은 비닐로 코팅한 메뉴판의 음식사진이 모두 발색이 제대로 안된 플라스틱 제품처럼 색깔이 죽어있어 도무지 그림만으로 음식 맛을 추측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둘째는 테이블에 내온 음식을 보면 건들이고 싶은 마음이 선뜻 나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먹어보면 은근히 끌리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전적으로 이것은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는데, 겉보기는 서양사람 같아 매우 낯가림 할 것 같지 않지만 한마디 말을 물어보면 두 마디 이상 대답하는 법이 없어서 괜히 물어봤나 하는 쑥스러움도 잠시, 마음 씀씀이는 매우 섬세해서 약삭빠르지 않고 속마음을 뒤늦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동화책에 나오는 음식그림처럼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그럴 듯 해보인다.


안산 외국인거리에도 러시아 음식점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거리구경과 중국 음식을 먹느라 기회가 없었고 처음으로 접해 본 것은 을지로 6가 파출소 건너편 골목에 있는 <투마리스>라는 테이블 3개 정도 있는 작은 카페(?)였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얼 먹길 래 저렇게 독한 술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먹어 제끼나’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 자리에 앉으니 메뉴판 하나 던져놓고 손님에는 관심없다는 듯 여주인은 구석자리에서 전화만 하고 있다. 하도 고르기 난감해서 여주인에게 무얼 먹으면 좋겠냐 물으니 양고기찜과 만두를 권한다.

 

Lepeshka. 일반 빵. 속에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위의 소스를 발라 먹거나 당근샐러드를 올려 먹는다

 

스프라기보다도 우리의 무국 같은 느낌이다.

차라리 무국이라면 그렇게 알고 먹을 것을...

 

<투마리스>에서 제일 괜찮았던 양고기찜

 

맛은 있는데 모양이 늘어진 호떡 같은 만두

원래 이름이 Manty인데 이 사람들은 자기네 이름을 굳이 고집하지 않는다.

'너희들 먹는 만두 같은거니까 딴지 걸지 말고 그냥 먹어어~' 흑묘백묘. 


빵과 양고기 스프를 더 시키고 맥주를 시킨다. 난해한 수학 공식에나 나올듯한 글씨로 쓰여진 맥주가 나오고 터키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 문양이 그려진 앞 접시와 도자기 주전자에 차를 담아 내온다. 빵이야 빵이고, 스프가 띵띵 불은 것처럼 보이는 당근, 무, 콩이 있는 뿌연 국물에 양고기 몇 점 담가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점도가 있는 스프보다는 아마 우리 무국이 연상됐기 때문이었겠다. 양파 링이 올라간 양고기찜은 그래도 손이 간다. 양고기를 속으로 쓴 만두는 얇은 껍질이 늘어져 맛은 있었지만 그다지 시각적으로 식욕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Samsa 그냥 '빵 속에 고기'라고 직관적인 한국 이름을 붙여 놓았다.

방금 구워내서 촉촉하면서도 바삭하다.


그런데 <사마리칸트>라는 우즈베키스탄 음식점-사실은 동네 골목의 분식집 수준이지만-을 자주 들르게 된 것은 음식 이름도 직관적인 ‘빵 속에 고기(samsa)’라는 것을 시켜먹고부터인데 한 조각에 2천5백원에 불과한 이 빵은 다진 양고기와 양파로 속을 넣고 껍질은 갖 구운 페스트리로 되어 바삭바삭해서 놀라운데 이 집에서 만드는 한 봉지 10개짜리 싸구려 빵까지 이런 방식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Lepeshka라는 일반 빵이나 양고기나 모두 이 당근샐러드를 얹어 먹는데

심하게는 식초병을 들고 식초까지 또 뿌려 먹는다.

우리의 김치 같은 위치인가 보다.

 

양고기꼬치 


모르는 길은 물어 가야 한다. 곁에 앉아 있는 러시아 사람들을 보니 이런 빵이나 속이 없는 빵에 당근샐러드를 얹고 식초까지 뿌려가며 술한잔 곁들여 맛있게 잘 먹고 있다. 외국에 오래 있다 들어온 한국동포가 자장면에 식초 뿌려먹는 것을 보고 ‘아 옛날에 그랬었지’하고 아스라이 추억이 떠오른 적은 있지만, 빵에 식초를 뿌려 먹다니? 원래 그렇게 먹느냐 물으니 식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한다. 그걸 보고 친구는 옛날엔 밀가루가 좋지 않아 냄새가 많이 나서 식초를 쳐서 먹었다는 그럴듯한 해석을 하는데, 이게 그렇게 한번 먹어보니 빵을 먹을 땐 의례 당근 샐러드를 듬뿍 올려서 먹는 인이 배기고야 말았다. 그러나 식초는 치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꼭 당길 때만 드시도록.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하고 있는 알리씨. 양갈비찜이다.

 


이 우즈베키스탄 음식점은 고급 음식점이라기보다는 우리 식의 밥집이나 실비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값만 싸다고 손님이 꼬이나? 급하면 홀서빙도 하는 부지런하고 솜씨좋은 알리라고 불리는 주인겸 주방장 덕분에 저렴하고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 같다. 알코홀 냄새가 그다지 나지 않는 40%짜리 새까만 병에 들은 티그로프(Tigroff) 보드카와 가격에 있어 기네스와 비교할 수가 없는 바티카 No6 흑맥주는 이 집의 존재가치를 더욱 올려 주는데 이제 좀 더 단골이 되면 나도 밍밍한 러시아 흑빵에 당근 샐러드 올려놓고 흑맥주의 쌉싸름한 맛과 부드러운 거품이 입술을 적시는 맛을 즐길 수 있으려나?

 

상당히 고급스럽게 보이는 <티그로프> 보드카

난수표나 난해한 수학공식에 나오는 글씨 같은 것 때문에 40%라는 글씨를 한참만에 찾았다.

 

이거 맛있고 양 많고 거품 많고 기네스의 절반 값이고

보리빵과 잘 어울릴 것 같다.


알리씨가 음식 만드는 것을 보고 싶다면 몰라도 주방이 개방돼있어 여름에는 실내가 덥다. 혹 여자친구와 함께 간다면 10여 미터 아래 젊었을 적에는 한가닥 했을 법한 러시아 아줌마가 서빙하는 좀 더 깨끗하고 시원한 홀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시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런데 나중에 계산을 하려고 하면 세무조사를 받아도 해독이 안될 것 같은 필기체로 쓴 노트를 펴들고 가리키며 “3초온~”하는데 너무 감격할 필요 없다. 카드를 주면 3만2천원이 제대로 찍혀 나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