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먹기

우리는 향수를 먹는다- 도깨비 칼국수, 우정식당 간장게장

fotomani 2022. 12. 13. 08:19

내가 6남 1녀 중 막내인데 둘째 형수가 미국에서 들어왔습니다.

몇 년 전 왔을 때 '다음에 올 땐 삼촌과 블로그에 올린 식당을 가보겠다'고 했는데

'젊은' 나도 아침에 일어나면 엉치가 시큰거려 한 시간 정도 워밍업을 해야 평상시 컨디션을 찾게 되는 터에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했지만 형수는 내 눈앞에 보란 듯 꼿꼿이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이젠 형수의 버켓 리스트 한 조각이라도 실현시켜 드릴 일만 남았네요.

6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에 간 사람들 같지 않게 형수는 아직까지 한국 토종 본성이 남아

재래시장과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영천시장 - 안산 자락길 일부 - 이대부중 - 이화여대 - 영등포 시장으로 코스를 정하고

카톡에 올렸습니다.   '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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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때나 들어와 보실 수 있습니다.

http://pf.kakao.com/_hKuds

북아현동이 형수가 살았던 곳이고 이대를 다니고 이대부중에 근무한 적이 있어 이 동네가 낯선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천시장은 이미 관광지가 된 지 오래고 파리가 날리던 시장은 아케이드 캐노피로 덮이고

상점들은 깨끗이 리모델링된 지 오랩니다.

'늦은 아침으로 간단히 베트남 쌀국수 드실래요?  칼국수 드실래요?' 

쌀국수는 미국에서도 먹을 수 있으니 칼국수 들자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정해 버립니다.

남들이 칼국수를 먹으러 일부러 영천시장에 들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 오픈 몇 분 전이어서 음식 나오려면 좀 앉아 기다려야 한답니다.

웨이팅이 없어 잘못 들어왔나 염려되려는 순간

일찌감치 시장 구경을 하며 쇼핑백을 들고 손님들이 들어 왔습니다.

단순한 비주얼과 달리 깊고 고급진 맛의 육수와 부드러운 면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흐르는 세월 막을 수가 있나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 무리하게 산책할 수는 없습니다.

홍제역에 내려 홍제천을 따라 인공폭포 메타세쿼이아 쉼터를 거쳐 봉원사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전에 한번 뵌 적이 있는 친구분께 연락해 영등포 시장역 근방에 있는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대역으로 갑니다.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형수는 간장게장이란 말을 듣고 거침없이 식당을 정해버렸습니다.

이 집은 시장 낡은 상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복도 사이로 테이블 세 개 갖춘 주방과

비슷한 크기의 건너편 별실로 돼있었습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하는 여사장님의 권유로 간장게장 2인분과 갈치구이를 주문했습니다.

알배추와 쌈장, 젓갈, 파김치, 배추김치, 뜬금없이 파프리카, 김무침, 버섯무침 등 밑반찬이 순식간에 깔렸습니다.

반찬들이 기대 이상으로 깔끔하고 맛 있습니다.

여자 손님 혼자 와서 된장찌개를 먹으며 반찬을 싹싹 비워줘서 고맙다는 주인장의 너스레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이어 나오는 버섯 된장찌개. 서비스로 조기를 더 올렸다는 갈치구이, 잘라 나온 간장게장.

집에서 생선구이를 하려면 진동하는 냄새도 냄새지만 맛나게 굽기 어렵습니다. 특히 조기의 비린내란...

사이좋게 하나씩 들라고 인원에 맞춰 내왔습니다.

비록 사이즈가 작은 꽃게였지만 살이 실하게 차면서 짜지 않고 알맞게 절여진 걸 보면

소문처럼  하루 전에 담가 다음 날 낸다는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주객이 주고받는 우스개 소리 속에 어느새 게장과 생선구이, 반찬 그릇들은 모두 비워졌습니다.

복도 옆집이 다방이었는데 알루미늄 새시문을 열면 커튼이 나오고 속에 푹 꺼진 소파에 영감님들이 앉아 있어

70년대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듯한 재미있는 풍경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밥을 먹은 게 아니라 향수를 먹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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