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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사명대사 지팡이가 왜 기둥으로 쓰였지?

fotomani 2010. 2. 8. 11:07

 

 

충남 운산면 개심사는 운산목장을 가로질러 얕은 산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절이다. 

일주문을 지나 세심동이라는 표석이 있는 곳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산이 험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울창한 소나무 숲은 절이 깊은 산속에 자리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계단 끝자락에서 보이는 범종각과 안양루, 상왕산개심사라 쓰인 현판이 보인다.

개심사 풍경은 꽃이 만개했을 때 커다란 배롱나무와 범종각이 연못과 함께 어우러져 절정을 이룬다.

  

개심사가 있는 상왕산 자락은 소나무 숲이 울창해 깊은 산속에 들어온 것 같다.

 

속인이 볼 때 개심사는 온통 구부러진 기둥으로 만들어진 절처럼 보인다.

아래쪽에서 볼 때에 범종각 기둥은 별로 구부러진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안양루 앞에서 뒤돌아 보면 만곡도가 장난이 아니다.

완주 화암사와 비슷한 배치를 하고 있는 개심사는

대웅보전 앞뜰로 진입하는 동선마저 화암사와 비슷해서 안양루 옆 골목을 통해 앞뜰로 진입하는데

 이 골목이 압권이다.

심검당에 붙여지어 놓은 요사채 출입문의 하인방과 기둥, 대들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집에 대한 개념을 해체해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듯 보인다.

마치 백남준의 예술처럼...

 

배롱나무 꽃이 만발할 때 개심사 풍경이 절정이다.

 

 아랫 마당에서 보면 여느 절 여느 범종각과 다를 바 없지만 이와같이 뒤에서 보면

기둥의 만곡도가 장난이 아니다.


절이나 서원, 오래 된 집들을 보면 대들보나 기둥이 휘어 있는 것을 가끔 보게 되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최준식 교수는 이것을 ‘자유분방미“로 보았고,

김봉렬 교수는 조선 후기 곧은 자재가 부족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와

휜 나무가 역학적으로 힘을 더 잘 받는다고 설명하였다.

 

선운사 만세루

 

겉으로 보면 9칸의 평범하고 커다란 건축물인데

내부 대들보는 곧은 재가 하나도 없이 모두 굽은 재로 만든 대들보로 되어 있다.

 

어떤 설명이든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혼마규수케라는 일본인이

1890년대 조선 문물을 대하고 쓴 조선잡기에 조선의 도로 사정에 대해

‘부산에서 경성까지는 일본의 마을길보다도 심하게 울퉁불퉁하여

군대가 일렬로 가지 않으면 통행이 어렵다’라고 기록해놓은 것을 보면

이 시기에도 대량의 물류공급을 위한 도로사정이 너무나 열악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안성 청룡사 대웅전 역시 기둥이 굽은 것으로 유명한 절이다.


우리의 옛 건축 해설을 보면 유독 눈에 띄는 글귀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라는 글이다.

허긴 임진왜란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소실되었으니

승병의 본거지였던 사찰들의 피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도로사정은 조선잡기에 쓴 것보다도 3백 년 전이니

큰 규모의 건축물에 사용될 커다란 목자재 공급이 수월치 않았을 것은 쉽게 짐작된다.

 

 

굽은 재를 쓴 이유가 자재부족일까?

 

역학적인 특성때문일까?

 

자유분방미 때문일까?


최근에 경회루 추녀가 내려앉아 보수를 했다.

우리 문화유산이니 우리 소나무를 써서 고치자는데야 군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문제는 굵은 쪽이 1미터가 넘고 가는 쪽이 80센티 정도가 되고 길이 13미터가 넘는 소나무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커다란 소나무가 있단 말을 듣고 가보면 모두 기준미달이었다.

산이 잘 가꾸어졌다는 현재에도 그러니 일반 사찰 대웅전 기둥 굵기 60센티 이상 되는 나무를 구하자면

거의 1백년 정도 커야하는데 이런 나무가 간단히 구해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임진왜란 후라 하나 깊은 산에는 이처럼 커다란 나무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타지방에서 커다란 나무를 베어 오는 것보다 깊은 산에서 잘라 끌고 내려오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충북대 연륜연구센터팀(박원규교수)가 안성 청원사 대웅전을 조사한 바로는

목부재가 1535-1550년 사이에 벌채된 것이고 사용된 목재는 주로 소나무인데

그 외에 전나무속과 활엽수종인 상수리나무아속, 밤나무속, 느릅나무속, 느티나무속,

봉나무속, 참죽나무속까지도 사용되었다 한다.

임진왜란 전에도 소나무 외에 다른 나무들을 같이 사용하였다면

건축자재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전후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볼 때

휘어진 대들보나 기둥은 일단 곧은 자재를 쉽게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심검당에 붙여 쓰고 있는 요사채.

대들보 위 동자주 한편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일 것이다.

'이런 걸 상상이나 해봤어?'라고 묻는 것 같다.

 

대웅보전 앞뜰로 들어가는 진입로. 편안한 기둥선, 서까래, 아침 볕의 조화가 아름답다.

이런 진입방식은 완주 화암사에서도 볼 수 있다.

 

같은 건물 요사채 뒷편 대들보와 배롱나무 꽃


먹물 냄새가 안 나는 장인의 솜씨는 분청사기 문양에서 잘 나타나는데

투박하면서도 현대감각의 문양은 그것 하나만 따로 떨어뜨려 현대 공예품에 차용한다 하더라도

구식의 텁텁한 냄새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세련돼있다.

 

흔히 건축을 예술이라고 한다.

구상 단계에서 남들이 하는 대로 답습만 한다면 그런 소리는 안 나왔을 것이다.

제한된 재료로 가장 창의성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바로 장인 아니던가? 

굽은 재밖에 없다고 한숨만 쉬고 있을 것인가?

 

개심사 해탈문 

개심사 명부전

 

개심사 무량수각 부속채 기둥


‘수원의 화성(신영훈)’을 보면 화성의궤에 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석수들에게 노임을 줬다고 하는데

목수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을 보면, 목수보다는 석공이 대접을 더 받았을 것으로 유추되는데

석공에 대한 노임도 문제지만 산속에서 커다란 돌을 운반하고 정으로 돌을 다듬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산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굽은 목재와 제멋대로 생긴 주춧돌일 수밖에.

 

여기에서 목수들의 빼어난 장인 정신이 발휘된다.

주춧돌을 배치하고 표면의 요철에 맞춰 기둥바닥을 깎고(그랭이질)

굽은 기둥과 굽은 대들보는 음양과 균형을 맞추어 짜 맞추니 이것이야말로 수의수처(隨意隨處)가 아닌가?

별 쓸모없는 것 같던 나무도 제 생긴 대로 이 세상에 생겨나온 의미를 찾아주고

좀 굽었으면 굽은 대로 가져다 써보니 자연미가 살아나고 강도도 유지되니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로구나.

 

 다시 한번 볼까요?

 

궁즉통(窮卽通)이라고 해서 구질구질하다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소리는 하지말자.

우리 건축기법은 목조 결구법에 충실할 뿐 아니라 귀솟음, 안쏠림, 처마안허리 등

현대 문자도안에서나 사용할 법한 착시현상 교정 건축기법까지도 응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목조건축물로써 5백년이상 버티고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개심사 굽은 기둥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가?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안양루 창문으로 본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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