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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요리집으로 납신 관운장

fotomani 2013. 7. 15. 07:54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곳에 동묘역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근방에는 벼룩시장이 있어 중고물품과 사람들로 들끓는 곳이라 일부러 구경을 하러 들른다면 몰라도

차타고 지나가다 그 군중 속으로 끼어들 생각은 별로 나질 않는 곳이지요.

그러나 항상 궁금증은 있어왔습니다.

동묘를 들러본 것은 20123월이지만 사진을 찍고도 그냥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동관왕묘는 서울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으로,

관왕묘는 중국의 장수 관우의 조각상을 두고 제사 드리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 선조가 지었다.

명나라에서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문묘처럼...’

 

 

사당 앞에 세워진 해설판에는 이렇게 뻔한 소리를 써놓고 거기에 선조 임금까지 들이대니 영 마뜩지 않습니다.

문화재 해설사가 관광객을 앞에 두고 어떤 식으로 해설을 할지 보지 않아도 하품이 나올 지경이지요.

 

 

그런데 얼마 전 <서울은 깊다-전우용>이라는 책을 하나 구입해 읽었습니다.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답사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돈이 되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거나 구질구질해서 지워버리고 싶은 서울 역사의 흔적들은,

다양하고도 해박한 지식과 색다른 시각의 고찰방법과 재미있게 쓴 글로 새로 태어나

책을 손에서 떼게 하지 못한 책입니다.

(아래 글은 이책의 동묘에 관한 글을 요약각색 또는 발췌한 것입니다.) 

 

(인터넷 사진. '꽁시파차이 恭喜發財'는 부자되세요라는 덕담이라합니다.

저 부적은 아름다운 꾸냥이 들고 있기도 하고 그냥 입춘대길처럼 써붙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하여간 이 책 와룡묘라는 단원에 이 동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문화권에서 관우는 이미 신격을 얻었지만,

그 스스로 종교를 만들거나 무슨 교리를 설파한 적은 없다.’라고 슬쩍 까면서,

관우를 보고 싶으면 중국집에서도 청룡언월도 대신 재산이 늘어남을 기뻐한다는 뜻의

공희발재(恭喜發財)라는 부적을 들고 선 사업가 관우 초상을 볼 수 있을 거라 말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영웅으로 떠받들어 모시는 관운장을 음식점 구석에 이렇게 초라하게 구겨 버리다니?

 

(밖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건만 파고다 공원처럼 사람들로 들끓질 않으니

관우귀신의  '잡인의 접근을 금한다'는  호령 때문인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핍박을 받으며 동오의 옛 땅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남송대에

관우에 대한 예우는 군신(軍神)이었답니다.

싸워 이기려면 당연히 군인의 무운을 빌어줄 신이 필요했었겠지요.

 

한족이 중국 전역에서 몽골의 원을 몰아내는 싸움을 벌이고 있던 때 삼국지연의를 쓰고 있던 나관중은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주자학의 합리주의로 소설에서 귀신 이야기를 전부 뺐지만

이례적으로 관우가 죽은 후 관우 귀신이 여몽을 죽이고 아들 관흥을 구한 얘기 등 활약을 나열합니다.

그렇게 군신으로 추앙하며 명을 세웠다가 나라가 평온해지니 군신으로써 관우는 용도 폐기 됩니다.

 

 

그러나 명말 임진왜란으로 위기가 오니 명나라 장수들은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군신 관우를 다시 불러냅니다.

조선에 출병하는 군사들은 옛날 관흥을 구했던 것처럼 자신을 적의 총칼로부터 보호해달라고 빌었던 것이지요.

이게 효험이 있었는지 명나라는 조선에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답니다.

 

(묘호가 엄청 깁니다.)

 

곧이어 북방에서 후금이 밀고 내려왔는데 망자존대(妄自尊大-앞뒤 생각없이 함부로 잘난 체함)

황제 신종께서 신통력을 더 발휘하라고

관우를 칙봉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어차피 한자로 바꿔도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생략)’으로

몇 계급 올려 일시에 관우는 관제(關帝)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승진의 부작용 탓인지, 관우는 이 전쟁에서 이렇다 할 신통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

 

(이렇게 외벽 중간에서 처마가 서로 맞닿아 있으면 내부에 비가 새거나 외벽으로 빗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데

내부구조가 궁금합니다. 잠겨있으니 들어가볼 수도 없고...)

 

 

군신 관우가 이 땅에 들어 온 것은 임진왜란 때 출병한 명나라 군사 뒤를 따라서인데,

처음에는 남산기슭에 명나라 장군들에 의해 남관왕묘가 만들어지고

이듬해에 동대문 밖에 선조가 전란으로 없는 돈 긁어모아 새롭게 관왕묘를 만드니 이게 동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주국방하지 않으면 방위비 분담금을 물어야지 무임승차는 못 봐줬던 모양입니다.

 

 ‘동관왕묘는 남관왕묘보다 더 크고 번듯했으나 그보다 더 사람의 눈길을 끈 것은 이국적인 양식이었다.

건물과 문, 소상까지 모두 중국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 군대는 돌아갔지만 관우 귀신은 따라가지 않았다.

서울 동남쪽 양 대문 밖에 버젓한 집이 있는데, 그냥 돌아갈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 되니 동묘가 새롭게 보이지 않습니까?

왜 필요에 따라 관우가 군신 혹은 재신이 되는 유래는 스포일러가 될 듯하니

웬만하면 그냥 한권씩 사서 보시지요?

그런데 중국 귀신을 모시는 관왕묘가 민족 자존심을 해친다고 하여

그를 모두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이 나온 바 있다....

동북공정 이후로 악화된 대중국 감정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서울의 군신 관왕은... 왜적을 상대하는 관왕이었지 중국인을 수호하는 관왕은 아니었다.’

역사적 의미를 둡니다.

 

 

필요에 따라 지엄한  관우장군을 군신으로도 올려 모시고 혹은 재신으로도 곁에두고 모실 수 있는

중국인 사고의 유연성도 놀랍지만

내가 조르기라도 했나?

이리 치고 저리 차이면서도 싫은 내색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운장의 모습을 보면서

초라하고 궁색하고 왜소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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